[그때 그 사건]20년 만에 드러난 안산강도 사건…반전의 반전, 과연 진실은

 

지은 죄의 무게만큼 형을 선고받고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사라진 이들.

 

이들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채 살아가지만 그들의 목소리까지 완전히 갇히는 것은 아니다. 교도소의 높은 담장 안에서 쓰인 편지들은 때때로 바깥세상으로 흘러나오고, 그 안에는 법정에서 못다 한 말과 억울함의 호소, 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사건의 조각들이 담겨 있다.

 

교정시설에 배포되는 신문 중 유일한 법률신문인 더시사법률에는 하루 수십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누군가는 재판에서 못다한 변경을 되풀이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범행의 무게보다 억울함을 앞세우며 재판 기록과 수사기록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 2025년 6월 1일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씨가 보내온 편지는 여느 편지와 달랐다.

 

이씨는 “2020년 8월 안산단원경찰서 형사들로부터 2001년에 발생했다는 강도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조사를 받았다”며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제 DNA가 나왔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제가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고 했지만 경찰은 제가 어릴 적 본드를 많이 해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이라고 했다”며 “자백을 요구했다”고 호소했다.

 

재소자들이 보내오는 억울함의 호소는 대개 “현장에는 있었지만 내가 한 것은 아니다”, “방어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공범의 역할이 더 컸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씨의 주장은 달랐다. 그는 “사건 장소에 간 적도 없고, 안산에 간 적도 없으며, 살인을 저지른 사실도 없다”고 했다.

 


“목에 칼이 대어 있었다”…2001년 안산 연립주택 강도살인


이씨가 보내온 두 번째 편지에는 공소장이 들어 있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사건은 2001년 9월 8일 새벽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의 한 연립주택에서 벌어졌다.

 

이씨는 성명불상자와 함께 건물 외벽의 가스 배관을 타고 올라가 잠기지 않은 창문을 열고 베란다를 통해 집 안으로 침입한 것으로 기재됐다. 이후 부부를 흉기로 위협하고, 저항하던 남편을 살해한 뒤 현금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내용이다.

 

생존 피해자인 김씨는 당시 범인들의 인상착의에 대해 검은색 정장에 구두를 신은 남성들이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수사기관은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고 사건은 장기 미제로 남았다.

 

2019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DNA 감식으로 특정된 뒤 전국 경찰서에는 미제 강력사건에 대한 DNA 재감식 지시가 내려졌고, 2001년 안산 강도살인 사건도 다시 수사선상에 올랐다.

 

안산단원경찰서는 현장 관련 증거물로 보관 중이던 검정색 테이프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당시 언론은 “안산 강도살인범 20년 만에 검거”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씨는 강도살인 혐의로 사건은 검찰로 송치됐다.

 

하지만 이씨는 본지에 “제가 저지른 범죄가 아니기에 아니라고 호소하는 것”이라며 “너무나도 미치고 답답하다”고 했다.

 

이씨는 “2020년 안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2021년 3월 검찰로 송치됐지만 검찰은 3년 넘게 기소하지 않았다”며 “담당 검사가 세 번 바뀌었고 결국 누나가 검찰청에 민원을 넣은 뒤인 2024년 12월에야 기소됐다”고 주장했다.

 

 

본지는 이씨의 편지와 관련 자료 일부를 경찰 출신인 법무법인 민의 윤수복 변호사에게 의뢰했다.

 

윤 변호사는 “이춘재 사건 당시 DNA로 피의자를 특정한 경우와는 석연치 않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며 “DNA라는 결정적 증거가 있었다면 검찰이 장기간 기소를 미룬 사정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검사 출신 신승우 변호사도 “DNA 검출 증거가 명확했다면 장기간 기소하지 않은 점은 다소 이례적으로 보인다”며 의문점을 제기했다.


공소장에 없는 ‘검정테이프’


이씨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는 것은 DNA가 검출됐다는 검정테이프다.

 

이씨는 “공소장에는 검정테이프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며 “경찰의 증거조작을 의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이씨가 보낸 공소장에는 피해자를 결박한 도구로 전선과 브래지어 끈이 기재돼 있었다. 공소장 어디에도 검정테이프가 피해자를 결박하는 데 사용됐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이씨는 수사보고서에도 의문스러운 대목이 있다고 했다.

 

2021년 3월 안산단원경찰서가 전주지방검찰청으로 추송한 증거물 목록 중 검정색 테이프가 담겨 있어야 할 비닐에는 제7호로 보이는 검정색 전기선이 담겨 있었고, 오히려 제7호 비닐봉투는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담당 경찰관은 일부 압수물이 분실됐다고 했다.

 

 

또 검정테이프가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 어떤 경위로 확보됐는지에 대해서는 수사기록 자체에서도 의문이 남는다.

 

유류품 인수 인계서에는 이 사건 테이프가 현장 안방 소파 위에서 수거됐고, 피해자 김씨로부터 건네받은 것으로 기재돼 있었다. 하지만 사건 당시 생존 피해자인 이씨는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을 때 이미 병원으로 이송된 상태였고, 피해자 아내 역시 현장 감식이 시작될 무렵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재판부 또한 피해자로부터 제출받아 압수한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테이프를 가져왔다면 왜 전선과 브래지어 끈을 썼을까”


이 사건에서 남는 의문은 또 있다.

 

만약 범인이 강도 목적으로 사전에 검정테이프를 준비했다면, 왜 피해자의 손발은 테이프가 아닌 전선과 브래지어 끈으로 묶였을까.

 

범죄심리 전문가는 “강도를 하면서 테이프를 도구로 가져왔지만 범행 과정에서 상황이 틀어졌을 수 있다”며 “이후 선풍기 선 등을 절단해 결박에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설명 역시 의문을 남긴다. 피해자는 심하게 출혈하고 있었고, 범인이 테이프를 사용하려다 실패했다면 전선과 브래지어 끈처럼 테이프에도 혈흔이 묻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박하기 쉬운 테이프를 놔두고 굳이 전선을 절단해 사용했다는 점도 쉽게 납득되지는 않는다.


“안산 간 적 없다”던 이씨…전입 기록과 차량 등록 정황


그러나 이씨의 주장도 일관되지는 않는다.

 

이씨는 “안산에 간 적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는 사건 발생 열흘 전 이씨가 안산시 원곡동으로 전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또 그 무렵 이씨가 자동차 구매를 위한 대출을 받아 차량을 구입했고, 해당 차량이 안산 차량등록사업소에 등록된 정황도 확인됐다.

 

 

이에 대해 이씨는 “그동안 이 사건의 범인으로 오히려 의심을 더 받을까 봐 말하지 않았다”며 “사건 발생일 무렵 안산 월피동에서 강도를 한 적이 있고, 그때 사용한 물건이 절연테이프였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안산에 간 적도 없다고 했다가, 이후에는 안산에서 별도의 강도 범행을 했다고 말을 바꾼 셈이다.

 

이씨 주변 인물들의 진술도 복잡하다. 취재진이 만난 이씨의 친구는 “걔 성격이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애는 아니다”라면서도 “도둑질을 할 때 베란다 옆 배관 같은 것을 타고 올라갔다. 맨몸으로 10층 가까이 올라가는 것도 봤다”고 말했다.

 

이는 공소장에 적힌 배관을 타고 침입했다는 범행 방식과 겹친다.

 

또 이씨가 평소 정장을 자주 입었느냐는 질문에 친구는 “원래 평상시에 정장을 자주 입었다”며 “2000년대 초반에도 항상 정장을 입고 다녔다”고 했다. 생존 피해자 김씨가 기억한 범인의 모습도 검은 정장 차림 남성 2명이었다.

 

이씨가 안산 사건의 진범인지 여부와 별개로, 그의 과거 범행 양상도 수사기관이 주목한 부분이다.

 

 

이씨는 2017년 한 주택가의 혼자 사는 여성 집에 침입해 흉기로 위협하고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처벌받았다. 당시 생수병과 이불에서 이씨의 DNA가 나왔고 폐쇄회로TV에도 이씨의 모습이 포착됐다.

 

피해자는 이씨가 칼을 목에 대고 위협했으며 “나는 콘돔도 사용하고 DNA를 남기지 않는다. 네가 신고해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침입, 흉기 위협, 성범죄, 증거 회피 발언이라는 요소는 이씨에 대한 의심을 키우는 정황으로 거론된다.

 


사라진 공범 의문…피해자가 본 남성 2명은 누구였나


이 사건에서 풀리지 않은 또 하나의 의문은 공범이다. 생존 피해자는 범인을 검은 정장 차림 남성 2명으로 기억했다. 공소장에도 이씨와 성명불상자가 함께 범행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씨는 2001년 9월 8일 안산 사건 발생 닷새 전인 9월 3일 전주에서 강도강간 사건을 저질렀다. 당시 공범으로 남씨가 함께 검거됐다.

 

이씨는 해당 사건을 남씨와 둘이 했다고 진술했고 남씨는 김씨와 배씨 등 다른 공범 두 명이 더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은 수사선상에서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취재 과정에서 당시 이름이 언급된 배씨가 2001년 살인사건 당시 안산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됐다.

 

제작진은 배씨를 찾아갔다. 배씨는 “이씨가 안산에 온 적도 없고 나를 만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9월 3일 전주 강간 사건과 9월 8일 안산 강도살인 사건 모두 자신과 무관하다고 했다.

 

이씨와 함께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남씨 역시 취재진에게 “안산에 간 적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의 안산 사건 연루 주장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며 “테이프도 이씨가 버린 건데 누가 그걸 범행에 사용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만약 이씨가 실제 범인이라면 또 다른 의문이 남는다. 수사기관 판단처럼 피해 남성을 직접 살해한 사람이 다른 공범이라면, 이씨는 왜 그 공범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생존 피해자는 범인을 검은 정장 차림 남성 2명으로 기억했고, 공소장에도 이씨와 성명불상자가 함께 범행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씨가 살해 행위를 직접 하지 않았다면 공범의 존재를 밝히는 것이 책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DNA 등 직접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이씨가 공범을 구체적으로 지목한다면 사건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판사 출신 변호사는 “피고인이 공범을 지목하면 중요한 직접 진술이 될 수 있다”며 “다른 정황증거와 맞물리면 유죄 판단의 근거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남편이 장애인이 되어도 좋으니 살려만 주지”


취재진은 어렵게 숨진 피해자의 배우자 김씨를 만났다.

 

김씨는 방송 출연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당시 신혼 초에 겪은 일”이라며 “남편 눈은 감게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나오게 됐다”며 “남편이 장애인이 되어도 좋으니 살려만 주지, 그냥 살려만 주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일단 한 사람, 그 한 명을 잡아서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사람이 그렇게 죽어서 갔는데 누군가는 사회에서 이렇게 산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다.

 

김씨는 “이씨가 정말 범인이라면 공범을 말해서 그 한 사람을 잡을 수만 있다면 선처해 줄 수도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DNA는 이씨를 가리키지만,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이씨가 진범이라면 죗값을 받아야 한다.

 

생존 피해자가 기억한 또 다른 공범도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반대로 이씨가 진범이 아니라면 20년 넘게 미제로 남아 있던 살인사건에 또 다른 억울한 사람이 세워지는 셈이다.

 

검정테이프의 DNA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날 새벽 피해자의 집에 들어간 두 명은 누구였는가.

 

그리고 이씨의 말은 억울한 호소인가, 아니면 빠져나가기 위한 또 다른 진술인가.

 

반전의 반전이 이어진 이 사건의 결론은 아직 법정에서 내려지지 않았다. 이씨가 정말 범인인지, 검정테이프의 증거 가치가 어디까지 인정될지는 항소심 재판에서 다시 가려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