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누명’ 홍성록씨 유족 일부 승소…“수십 년 낙인 피해 반영 안 돼” 항소 예고

법원 “국가가 각 3857만원 배상”
유족 측 “장기간 감시·낙인 지속”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 용의자로 지목돼 강압수사를 받았던 고(故) 홍성록씨의 자녀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다만 유족 측은 장기간 이어진 사회적 낙인과 정신적 피해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06단독 안동철 부장판사는 15일 홍씨 자녀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3857만여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나머지 청구는 기각했다.

 

홍씨는 1987년 발생한 화성 연쇄살인 3차·5차·6차 사건 당시 경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허위 자백을 했다.

 

유족 측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홍씨가 다방 종업원에게 “빨간 옷을 입으면 죽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영장 없이 연행했다.

 

홍씨는 약 일주일 동안 경찰서와 파출소, 여관 등지에서 수면 박탈과 폭행 등 가혹행위를 당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는 것이 유족 측 주장이다.

 

당시 검찰 내부에서도 자백의 신빙성을 의심했던 것으로 전해졌지만, 경찰은 1987년 5월 홍씨를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인으로 발표했다.

 

이후 홍씨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으나 장기간 경찰의 동향 파악과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고, 지역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의심의 대상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정신적 고통을 겪다 2002년 간암으로 숨졌다.

 

유족 측은 국가 수사기관의 불법 수사와 공개 지목으로 가족 전체가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 나선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의 피해는 단순히 일주일간의 불법 구금에 그치지 않는다”며 “이춘재가 진범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화성 사건 용의자’라는 낙인이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상 창살 없는 사회적 구금 상태였는데 판결에 그 특수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유족들 역시 ‘살인자의 자녀’라는 시선 속에서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또 “수사 과정에서는 어린 자녀들까지 조사 대상이 됐고, ‘아버지를 보고 싶으면 똑바로 말하라’는 취지의 협박성 발언도 있었다”며 “홍씨 개인에 대한 국가폭력을 넘어 가족 전체에게 피해가 이어진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유족 측은 특히 재판부가 앞서 제시했던 화해권고 결정과 비교해 배상액이 크게 줄어든 점에 문제를 제기했다.

 

박 변호사는 “재판부는 앞서 원고들에게 각 1억70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화해권고 결정을 내린 바 있다”며 “변론이 다시 열리거나 특별한 사정 변경이 없었는데도 선고 금액이 크게 달라져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구금 기간만을 기준으로 위자료가 산정된 것으로 보인다”며 “항소심에서는 장기간 이어진 낙인과 사회적 피해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다투겠다”고 밝혔다.

 

유족 측은 영화 ‘살인의 추억’ 속 설정도 또 다른 상처로 남았다고 주장했다. 영화에 등장한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을 보면 성적 충동을 느낀다’는 설정이 실제 홍씨와 연결되면서 왜곡된 이미지가 고착됐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이번 판결과 별개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통해 국가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점이 다시 확인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화성 사건과 관련해 억울하게 수사를 받았던 피해자들에게 권리 구제의 길이 열려 있다는 점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약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 역시 국가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해 18억6000여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