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화성 연쇄살인 용의자로 몰린 홍성록 씨…30년간 ‘사회적 낙인’ 속에 살아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남은 피해자의 삶
이름·얼굴·주소·직장·가족관계까지 공개
“살인자의 자녀” 시선 속에 살아온 가족들

 

“홍성록 씨가 화성 부녀자 연쇄 폭행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1987년 5월 13일 KBS 뉴스9는 경기도 화성에 사는 40대 남성 홍성록씨가 화성 일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가운데 최소 3건의 범인이라고 보도했다.

 

홍씨가 경찰 조사에서 “가출한 부인이 평소 붉은색 옷을 즐겨 입어 술에 취했을 때 같은 색 옷을 입은 여인을 보면 이상한 충동을 느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는 내용도 함께 전해졌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홍씨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였다는 장면이 강하게 남았다. 그러나 홍씨가 일주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는 사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경찰에 끌려간 사람이라는 낙인은 오래 남았고 억울하게 석방됐다는 사정은 쉽게 잊혔다.

 

이 과정에서 홍씨의 이름과 얼굴, 주소, 직장, 가족관계와 사생활까지 공개됐다. 홍씨는 회사를 그만뒀고 형사들이 다시 찾아올 것을 두려워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이어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도 ‘살인자의 자녀’라는 시선 속에서 살아야 했다.

 

홍씨는 오랜 정신적 고통을 겪다 2002년 간암으로 숨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잘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우리나라 대표 장기 미제사건이었다.

 

1986년 첫 사건이 발생한 뒤 30년 넘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019년에야 이미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이춘재의 DNA가 사건 증거물과 일치하면서 진범이 드러났다. 이춘재는 이후 여러 건의 범행을 자백했다.

 

 

진범이 확인되기까지 시간이 길었던 만큼 억울하게 용의자로 몰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고 홍성록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홍씨는 1987년 5월 화성 연쇄살인 3차·5차·6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다. 유족 측에 따르면 경찰은 홍씨가 다방 종업원에게 “빨간 옷을 입으면 죽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영장 없이 그를 연행했다.

 

이후 홍씨는 약 일주일 동안 경찰서와 파출소, 여관 등지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조사를 받았다. 유족 측은 이 과정에서 수면 박탈과 폭행 등 가혹행위가 있었고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홍씨가 불법 구금됐던 시간은 152시간에 달했다. 그중 잠을 잔 시간은 19시간가량에 불과했고 서류철 등으로 폭행을 당한 끝에 여러 차례 허위 자백을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 같은 피해는 홍씨 사망 이후 자녀들의 국가배상 소송으로 이어졌다. 홍씨의 두 자녀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4억7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국가 측은 청구된 위자료가 과도하다고 맞섰다. 홍씨의 구금 기간이 6~7일에 그쳤다는 점 등을 들어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반면 유족 측은 피해를 단순히 일주일간의 불법 구금으로만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이 홍씨를 연쇄살인범처럼 공개 지목했고 그 결과 홍씨와 가족들이 수십 년 동안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국가가 홍씨의 자녀들에게 각각 3857만1428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선고 직후 유족 측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의 피해는 단순히 일주일간의 불법 구금에 그치지 않는다”며 “이춘재가 진범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화성 사건 용의자’라는 낙인이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사실상 창살 없는 사회적 구금 상태였는데 판결에 그 특수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유족들 역시 ‘살인자의 자녀’라는 시선 속에서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했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어린 자녀들까지 조사 대상이 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아버지를 보고 싶으면 똑바로 말하라’는 취지의 협박성 발언도 있었다”며 “홍씨 개인에 대한 국가폭력을 넘어 가족 전체에게 피해가 이어진 사건”이라고 말했다.

 

유족 측은 항소를 예고했다. 박 변호사는 “재판부는 앞서 원고들에게 각 1억7000여만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화해권고 결정을 내린 바 있다”며 “변론이 다시 열리거나 특별한 사정 변경이 없었는데도 선고 금액이 크게 달라져 당혹스럽다”고 했다.

 

이어 “항소심에서는 장기간 이어진 낙인과 사회적 피해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다투겠다”고 밝혔다.

 

홍씨 사건은 영화 ‘살인의 추억’과도 떨어져 보기 어렵다.

 

영화에는 빨간 속옷을 입은 성적으로 일탈된 인물처럼 보이는 용의자가 등장한다. 영화가 특정인을 직접 지칭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춘재가 진범으로 밝혀지기 전까지 화성 사건을 둘러싼 대중적 상상력은 당시 수사기관과 언론이 만든 ‘이상 성욕자’ 이미지와 분리되기 어려웠다.

 

박 변호사도 선고 전날 자신의 SNS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영화 ‘살인의 추억’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했다. 영화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둘러싼 시대적 공포와 수사기관의 폭력성, 강압수사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도 인정했다.

 

다만 이춘재가 범인으로 특정되기 전에 만들어진 영화였던 만큼 영화 속 용의자 이미지가 당시 수사기관과 언론이 만들어낸 ‘이상 성욕자’, ‘강간살인 용의자’ 이미지와 완전히 따로 존재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박 변호사는 “특정인을 직접 지칭하지 않았더라도 현실의 누군가가 떠오를 수 있는 장면이 있다”며 “사건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선택한 이미지가 누군가에게는 다시 한 번 낙인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 과정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은 홍씨뿐만이 아니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불법 체포와 감금, 폭행 등 피해를 본 사람이 최소 27명에 이른다고 판단한 바 있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약 20년간 복역한 윤성여씨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국가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홍씨처럼 유력 용의자로 지목돼 언론에 실명과 사진 등이 보도됐던 다른 피해자의 유족도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2019년 이춘재가 진범으로 확인되며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돼 이춘재는 해당 사건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그는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진범이 확인됐다고 해서 잘못된 수사로 남겨진 피해가 모두 회복된 것은 아니다.

 

체포 장면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지만 석방 사실은 흐려졌다. 허위 자백은 기사와 방송을 통해 퍼졌지만 억울함은 뒤늦게야 확인됐다.

 

잘못된 범인 지목은 당사자의 삶을 무너뜨리고 가족에게까지 오래 남는 낙인이 된다. 홍씨의 몸은 일주일 만에 풀려났지만 그와 가족에게 남은 의심의 시간은 30년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