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하늘을 꿈꿨던 공사 출신 부기장, 그는 왜 전 직장 동료를 향해 칼을 들었나

 


하늘을 꿈꾸게 하는 이름, 조종사


조종사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남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 구름 위로 솟구치는 영화 ‘탑건’의 한 장면처럼, 거대한 기체를 몰고 하늘길을 가르는 파일럿은 단순한 직업을 넘어 많은 이들이 한 번쯤 품어본 로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조종사가 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공군사관학교는 오랫동안 ‘하늘로 가는 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2019학년도 공군사관학교 제71기 사관생도 선발 경쟁률은 41.3대 1에 달했고, 해마다 수십 대 1 안팎의 경쟁률을 기록할 만큼 입학 문턱은 높았다.

 

일부 비조종 분야 선발이 있기는 하지만, 공사는 기본적으로 공군 장교와 조종 자원을 길러내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지원자 상당수는 조종사의 꿈을 품고 공사 문을 두드린다.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한 남성은 훗날 전 직장 동료들의 집 앞까지 찾아가 1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힌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다.

 

그는 일산서구의 한 주거지에서 전 직장 동료였던 항공사 기장을 덮친 뒤 도구로 목을 졸라 살해하려 했으나 피해자가 저항하면서 미수에 그쳤다. 현장을 벗어난 그는 부산으로 이동했고, 다음 날 오전 부산 부산진구의 한 아파트에서 또 다른 전 직장 동료 기장을 흉기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다.

 

수사 결과 그는 당초 알려진 4명이 아니라 모두 6명의 현직 기장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이름은 김동환. 그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했지만 조종사가 되지 못했고, 의무복무 기간을 마친 뒤 5년 차에 대위로 전역했다.

 


‘하늘이 선택하지 않은 자리’에 남은 첫 좌절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모두가 조종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도와 장교들은 공중근무 적성, 신체조건, 비행훈련 과정을 거쳐야 하고, 입문·기본·고등 비행훈련을 통과해야 비로소 조종특기를 받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조종특기를 받지 못한 이들은 관제, 정보, 정훈, 공병 등 다른 병과로 전환된다. 공군 안팎에서 “파일럿은 하늘이 선택하는 자리”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동환도 조종사의 꿈을 품고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갔지만 조종특기를 받지 못했다.

 

그는 조종 병과가 아닌 정보병과 장교로 복무했고, 의무복무 기간 5년을 채운 뒤 대위로 전역했다. 공사에 들어갔지만 끝내 군 조종사가 되지 못했던 첫 좌절은 훗날 그가 남긴 장문의 편지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조종사에 대한 미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군을 떠난 김동환은 민간항공 조종사의 길을 다시 두드렸다. 지금처럼 저비용항공사가 크게 늘어나고, 해외 비행학교를 거쳐 자비로 면장을 취득한 뒤 비행시간을 쌓아 항공사에 지원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기 전이었다.

 

당시에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 같은 대형항공사가 조종훈련생을 직접 선발해 국내외 교육과정으로 보내는 방식이 주요 통로였고, 항공사가 적지 않은 교육비와 훈련비를 부담하는 만큼 선발 과정도 수백 대 1에 가까울 정도로 까다로웠다.

 

그 시절 항공사 조종훈련생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단순한 취업을 넘어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에 가까웠다.

 

김동환에게도 그랬다. 그는 전역 직후 한 회사에 입사해 근무하던 중 대한항공 조종훈련생 선발 공고를 보고 시험과 면접을 거쳤고, 대한항공 조종훈련생 과정에 합격했다.

 

김동환은 2005년 2월부터 대한항공 조종훈련생 신분으로 국내에서 약 5개월 동안 자가용 조종사 이론교육을 받았고, 이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비행학교로 건너가 자가용 조종사 면장, 계기비행, 사업용 조종사 면장 취득과 일정 비행시간을 채우는 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김동환이 보내온 편지에는 미국 비행훈련 과정 중 몸이 아팠고, 평가와 훈련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러나 편지 곳곳에는 ‘공사 출신’이라는 자신의 이력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드러난다.

 

김동환은 동기들이 처음에는 자신과 가까이 지내다가도 공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거리를 뒀다고 주장했다.

 

특히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조종특기를 받고 민간항공사로 옮긴 조종사들이 자신을 같은 공사 출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이 공사에서 조종특기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치려 했다는 피해의식도 편지 전반에 깔려 있었다.


아시아나와 에어부산, 이어지지 못한 조종사의 길


결국 김동환의 대한항공 조종훈련생 과정은 정식 입사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이 과정을 단순한 훈련 탈락이나 평가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사 출신이라는 자신의 이력, 조종특기를 받지 못하고 전역했다는 열등감, 훈련 과정에서의 평가와 동기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로 받아들였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대한항공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양성한 조종훈련생을 아무 이유 없이 탈락시켰다고만 보기는 어렵고, 이후에도 김동환은 여러 항공사와 근무 과정에서 평가, 건강, 퇴사 문제를 반복적으로 겪었다.

 

그런데도 그는 실패와 불이익의 원인을 상당 부분 공사 출신 조종사들의 기득권과 항공사 내부 세력 탓으로 돌렸다.

 

이후에도 김동환은 조종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2006년 말 아시아나항공의 민간 출신 조종사 선발 공고를 보고 다시 지원했고, 2007년 2월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했다.

 

마침 이 시기 아시아나항공은 경영난으로 인해 민간 출신 조종훈련생을 직접 뽑아 장기간 교육시키는 방식의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자체 양성 중심에서 벗어나 일정한 비행 경력과 면장을 갖춘 조종 인력을 선발하거나 다른 항공사에서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방향으로 조종사 수급 방식을 조정하고 있었다.

 

김동환은 아시아나항공에서도 갈등으로 퇴사하고 에어부산에서 에어버스 A320·A321 기종 부기장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이 근무 역시 안정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가 남긴 항공사에서의 해고 이유는 공사 출신 조종사 기득권에 대한 원망으로 연결해 갔다.

 

김동환의 인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한 방향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건강 문제와 병가, 공사 시절 조종특기를 받지 못한 일, 대한항공 조종훈련생 과정에서의 좌절, 아시아나항공과 에어부산에서의 근무, 평가비행과 병가, 퇴사와 공제회 분쟁까지 각각의 별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자신을 밀어낸 하나의 구조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퇴사 이후 벌어진 조종사단체 공제회 분쟁도 그의 원망을 키운 또 다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공제회 분쟁은 김동환이 말하는 ‘공사 기득권’과 직접 연결된 사안으로 보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이 문제 역시 자신이 항공업계 내부에서 밀려났다는 인식 속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은 범행 직후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김동환은 검거 뒤 취재진 앞에서 “공군사관학교의 부당한 기득권에 억울하게 인생을 파멸당했기 때문에 제 할 일을 했다”는 말했다.

 

검찰 송치 과정에서도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를 언급하며 자신의 범행을 일종의 응징처럼 설명했다. 피해자와 유족을 향한 사과나 참회의 말은 없었다.

 

한때 하늘을 꿈꿨던 공사 출신 부기장의 마지막 항로는 비행장이 아니었다.

 

조종사가 되지 못했던 첫 좌절과 다시 조종석에 올랐다가 밀려났다는 분노, 공사 출신 기득권에 인생을 빼앗겼다는 뒤틀린 확신은 끝내 전 직장 동료들을 향한 계획범죄 혐의로 이어졌다.

 

그의 긴 편지와 항변은 법정에서 다뤄질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죽음과 유족에게 남겨진 시간은 어떤 말로도 되돌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