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미군의 신병을 한국 사법당국이 곧바로 확보하지 못하고, 교도소 수감 이후에도 일반 수용자와 다른 기준이 적용되던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 발생했다.
1992년 10월 28일 오후 4시30분쯤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의 한 셋방에서 미군 전용클럽 종업원 윤금이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집주인이 방문을 열었을 당시 윤씨는 온몸에 피멍이 든 알몸 상태였으며, 생식기에는 맥주병 2개가 들어가 있었고 질 밖에는 콜라병 1개가 박혀 있었다.
또 항문에서 직장까지 약 27㎝ 길이의 우산대가 꽂혀 있었고, 온몸에는 하얀 합성세제 가루가 뿌려진 채 입에는 부러진 성냥개비가 물려 있었다.
부검 결과 윤씨는 콜라병으로 머리와 얼굴 부위를 맞아 발생한 전두부 열창과 과다출혈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으며, 사망 시각은 같은 날 오전 2시쯤으로 판정됐다.
경찰은 현장에서 확보한 피 묻은 셔츠와 맥주병 지문, 사건 전날 윤씨와 한 미군 병사가 다투는 모습을 본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를 벌여 사건 발생 사흘 뒤인 10월 31일 오전 0시30분쯤 미2사단 정문 앞에서 부대로 돌아가던 미 육군 소속 케네스 리 마클 3세 이병을 붙잡았다.
마클은 검거 당시 범행 때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바지와 농구화를 그대로 신고 있었지만, 경찰은 미군 측의 신병 인도 요구에 따라 피의자신문조서도 작성하지 못한 채 그를 곧바로 미군에 넘겼다.
윤씨의 시신은 사건 이틀 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됐고, 유골은 동두천 상패동 공동묘지 인근에 뿌려졌다. 미군 당국이 유족에게 전달한 위로금은 60만원이었다.
피해자 윤금이씨는 1966년 10월 12일 전북 순창에서 5남 1녀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둘이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셋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집안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윤씨가 17세였던 1983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중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왔고, 처음에는 봉제공장에 취직했지만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하면서 이후 미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여러 기지촌을 옮겨 다니던 윤씨는 1992년 10월 11일 동두천시 보산동의 한 셋방을 얻었다. 자신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월세는 4만원이었고 방은 2평 남짓했으며, 비슷한 처지의 여성 14명이 함께 생활하는 이른바 ‘벌집’ 형태의 주거지였다.
윤씨는 사건 발생 약 2년 전 동거하던 미군에게 버림받은 뒤 술을 많이 마셨고 각성제를 복용한 상태에서 울거나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이 일로 미군 상대 클럽에서 외면받은 뒤에는 밤거리에서 꽃을 팔거나 미군을 상대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 방으로 이사 온 지 불과 17일 만에 살해됐다.
사건이 알려지자 동두천 지역 단체들은 1992년 11월 4일 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다음 날에는 4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해 마클의 구속과 처벌,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을 요구했다.
당시 SOFA 규정에 따르면 미군이 살인 등 중범죄를 저질러 한국 검찰에 기소되더라도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한국 사법당국이 신병을 인도받아 구속하기 어려웠다.
검찰은 마클을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지만 신병은 미군이 계속 관리했고, 한국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클은 국내 구치소가 아닌 미군 영내에 머물렀다.
1993년 2월 시작된 재판에서 마클은 윤씨를 폭행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살인 혐의는 부인했으나, 법원은 같은 해 4월 14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6일 항소심 재판부는 윤씨 유족이 미국 정부로부터 7100만원의 배상금을 받은 사정 등을 양형에 반영해 형을 징역 15년으로 낮췄다.
마클은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1994년 4월 29일 상고를 기각해 징역 15년형을 확정했고, 그의 신병이 한국 측에 인도된 것은 그로부터 18일이 지난 같은 해 5월 17일이었다.
윤씨가 살해된 지 1년 6개월이 넘은 뒤였다.
한국 교도소에 수감된 마클은 충남 천안소년교도소로 옮겨졌다.
당시 천안소년교도소는 비교적 새로 지어진 시설이었고 미8군 평택기지와 가까워 부식 전달과 관계자 방문, 병원 진료가 편리했다.
미군 측은 이런 이유로 SOFA 수용자를 천안에 수용하기를 원했고, 교정당국도 SOFA 수용자 한 명을 수용하려면 별도 식당과 샤워실, 운동공간 등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교정시설로 나눠 수용하지 않고 천안소년교도소에 모아 수용했다.
당시 영치품 업무를 담당했던 천동성 전 교도관은 “마클이 호송차에서 내릴 때 교도소 정문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며 “신입실에서 처음 봤을 때는 몸을 움츠린 채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마클이 수용된 SOFA 사동에는 1968년 마련된 ‘SOFA 수용자 구금시설에 대한 최저기준’이 적용돼 일반 수용시설과 다른 생활환경이 제공됐다.
SOFA 수용자는 1인당 최소 6.69㎡, 약 2.02평 이상의 거실을 사용했는데, 당시 한국인 수용자 3명이 함께 사용하던 규모의 방을 혼자 썼으며 침대와 생활 비품도 미군 부대에서 제공했다.
식재료와 식수 역시 평택 미군기지에서 공급해 매주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계란, 햄, 채소, 과일 등 일주일분의 부식이 개인별로 전달됐고, SOFA 사동에는 별도의 식당과 냉장고, 부식 보관창고, 조리시설이 마련돼 수용자들이 끼니마다 직접 음식을 조리했다.
이 밖에도 세탁실과 샤워장, 역기와 아령 등을 갖춘 운동공간이 별도로 설치됐으며, 미군 관계자들도 정기적으로 교도소를 방문했다.
천 전 교도관은 마클이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교도관이나 동료 수용자에게 큰소리를 내고 과격하게 행동했다고 전했다.
1995년 5월 5일에는 어린이날 공휴일로 미군 부대의 부식 공급이 하루 늦어진 데 불만을 품고 다른 미군 수용자와 함께 복도 유리창을 깨고 교도관들에게 분말소화기를 뿌렸다.
교도소는 두 사람을 제압한 뒤 조사수용하고 사건을 수사기관에 넘겼다. 천 전 교도관에 따르면 그전까지는 일반 조사실과 징벌실이 SOFA 시설 기준에 맞지 않아 SOFA 수용자가 관규를 위반하더라도 조사수용을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교정당국은 마클의 난동을 계기로 미8군 법무감실과 협의해 SOFA 수용자를 처음으로 조사실에 수용했다.
초기에는 직접 음식을 조리해야 한다는 기준에 따라 식사 때마다 마클을 SOFA 사동 식당으로 데려갔다가 이후 동료 수용자가 만든 음식을 조사실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마클은 영치품 검사 과정에서도 반입이 허용되지 않은 물품을 지급하지 않으면 옷과 우표를 찢거나 비디오테이프를 발로 밟는 등 과격하게 항의했다.
1999년에는 SOFA 직원식당 천장에서 담배 10갑 이상이 발견돼 조사가 진행됐고, 그 결과 마클에게 담배를 건넨 교도관이 파면됐다.
천 전 교도관은 이 사건을 교도관 생활 중 가장 가슴 아팠던 일로 꼽았다. 파면된 교도관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장기간 SOFA 사동을 담당했고 여러 차례 다른 교정시설로 전출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천 전 교도관은 “그 선배가 왜 자신만 몇 년 동안 SOFA 업무를 맡아야 하느냐며 다른 근무지로 보내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했다”며 “마클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클은 수감 중이던 2000년 8월 한 영자신문 독자투고란에 ‘SOFA를 왜 고치나’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 한국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SOFA 개정 움직임을 “웃기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한국 법원과 사법절차를 비하했다.
그는 형이 확정되기 전 미군 피의자의 신병을 한국 당국에 넘길 필요가 없으며 SOFA가 미국인을 더욱 보호하는 방향으로 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신문사는 뒤늦게 투고자가 윤씨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지면과 인터넷 게시판에서 글을 삭제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잔혹한 살인죄로 복역 중인 마클이 범행을 반성하기보다 SOFA 개정 움직임과 한국 사법제도를 비난했다며 반발했다.
복역 중 여러 차례 가석방을 신청했던 마클은 출소를 앞둔 몇 년 동안 별다른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고, 법무부는 2006년 8월 14일 그를 가석방했다.
마클은 다음 날인 8월 15일 미국으로 출국했으며, 그의 가석방 사실은 약 두 달 뒤 국회의 자료 요구를 통해 공개됐다.
천 전 교도관은 “마클이 출소하기 몇 년 전부터 가석방을 염두에 두고 사고를 치지 않은 것은 맞지만 죄질과 국민 법감정, 그동안의 수용생활을 보면 3년 이상의 가석방 혜택은 상식에 맞지 않았다”며 “SOFA 수용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금이씨의 삶은 스물여섯 살에서 멈췄지만, 그를 살해한 마클은 사건 발생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한국 교도소에 수감됐고 일반 수용자와 다른 거실과 식사, 생활 기준을 적용받은 뒤 형기를 모두 채우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현재도 SOFA 수용자에게는 여러 거실을 단독으로 사용하고 침대를 갖춘 별도 생활환경이 제공되고 있다.
이는 1968년 마련된 SOFA 합의의견 13호의 ‘수용자 구금시설에 대한 최저기준’이 58년째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