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현금 전달했어도 무죄…보이스피싱 판결 10건 분석해보니

현금 수거 사실보다 고의 중요
범죄 인식 여부 개별 판단해

 

A씨는 중고거래 플랫폼에 올라온 구인광고를 보고 한 업체에 취업했다. 처음에는 서류를 배송하거나 특정 장소의 사진을 촬영하는 업무를 맡았고 급여도 정상적으로 받았다.

 

이후 회사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 현금을 받아 전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A씨가 현금을 수거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보이스피싱 범행임을 알고 가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면 면접이나 근로계약서가 없고 카카오톡으로 지시를 받은 점은 의심스럽지만, 정상적인 업무로 믿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5일 더시사법률이 리걸테크 플랫폼 엘박스를 통해 최근 선고된 보이스피싱 무죄 판결 10건을 분석한 결과, 9건은 피고인의 미필적 고의나 보이스피싱 조직과의 공모가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나머지 1건은 고의 여부가 아니라 검찰이 적용한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의 성립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 판단이 내려졌다.


 “정상적인 일인 줄 알았다”…9건 중 8건서 언급


고의와 공모가 쟁점이 된 9건 가운데 8건에서는 피고인이 채권추심이나 서류 배송, 대출 절차 등 정상적인 업무로 알고 범행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주요 무죄 근거가 됐다.

 

이 가운데 3건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처음부터 현금 수거를 지시하지 않고 서류 배송이나 사진 촬영 등 일반적인 업무를 먼저 맡긴 사건이었다.

 

일당이나 급여를 지급하고 회사명과 직책을 사용해 정상적인 업체처럼 신뢰를 쌓은 뒤 현금 수거 업무로 전환하는 방식이었다.

 

광주지법 목포지원 사건의 피고인은 구직사이트를 통해 취업한 뒤 실제로 서류를 배송하고 일당을 받았다.

 

이후 현금 수거와 무통장 입금 업무를 맡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자신의 실명을 사용했고 조직원과 나눈 대화에도 보이스피싱을 암시하는 내용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북부지법도 채권추심 아르바이트로 알고 현금을 전달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채용이 확산한 데다 조직원이 회사명과 관련 문서,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제시한 만큼 피고인이 보이스피싱 범행을 인식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대출을 받으려다 범행에 연루된 사례도 있었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사건의 피고인은 대출 광고를 보고 연락한 뒤 조직원의 지시에 따라 현금을 인출해 전달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이 과정을 정상적인 대출 절차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해당 피고인은 자신이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직접 조직원을 고소하고 통화기록과 메시지를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재판부는 이러한 사후 대응도 피고인이 처음부터 범행을 인식하고 가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사정으로 고려했다.


실명 사용·짧은 가담 기간도 무죄 근거


피고인이 범행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 않은 점도 무죄 판단에 반복적으로 반영됐다.

 

고의와 공모가 쟁점이 된 9건 중 3건에서는 피고인이 현장에서 실명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낸 사실이 언급됐다.

 

가담 기간이 짧고 현금 수거 횟수가 많지 않았던 점도 고려됐다. 처음에는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다가 짧은 기간 몇 차례 현금을 수거한 경우에는 피고인이 범행의 전체 구조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직원과 텔레그램으로 연락하고 메시지가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설정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대화 내용에 보이스피싱을 직접 암시하는 표현이 없고 피고인 역시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면, 특정 메신저를 사용했다는 사정만으로 범행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고의·공모 쟁점 9건 모두 “의심 아닌 증명 필요”


보이스피싱 사건에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려면 피고인이 범죄일 가능성을 단순히 의심한 정도를 넘어,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거나 용인했다는 점이 증명돼야 한다.

 

분석한 판결문에는 대면 면접이나 근로계약서가 없었던 점, 메신저로만 업무 지시를 받은 점, 수거한 현금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 방식이 비정상적이었던 점 등이 공통으로 언급됐다.

 

다만 재판부들은 이러한 사정만으로 피고인이 보이스피싱 범행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고의와 공모가 쟁점이 된 9건은 모두 피고인이 현금 수거 등에 관여했는지가 아니라, 보이스피싱 범행임을 인식하고도 가담했다는 점에 관한 검사의 증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고의와 무관하게 업무방해죄 무죄도


나머지 1건은 피고인의 고의나 공모 여부가 아닌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의 구성요건이 쟁점이 됐다.

 

법원은 피고인이 보이스피싱 피해금을 무매체 입금 방식으로 송금했더라도 은행 직원 등 업무 담당자가 오인이나 착각에 빠졌거나 실제 업무가 방해됐다고 볼 증거가 없다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법조계에서는 보이스피싱 조직이 정상적인 채용이나 대출 절차를 정교하게 가장하면서 현금수거책과 전달책의 고의를 판단하기가 이전보다 어려워졌다고 설명한다.

 

곽준호 법무법인 청 변호사는 “현금을 직접 받거나 전달했다는 결과만으로 피고인의 고의를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업무를 시작한 경위와 조직원에게 들은 설명, 제시받은 회사 정보와 문서, 급여 지급 방식, 업무 과정에서 접한 정황 등을 종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면 면접이나 근로계약서가 없고 메신저로 지시받았다는 사정은 고의를 판단하는 자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보이스피싱 범행임을 인식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범죄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현금 수거와 전달에 나섰다는 점이 구체적인 증거로 입증돼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