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일제 감옥 지키던 교도관, 제복 벗고 “대한독립만세”

마산감옥 교도관 박광연, 수감자 석방 요구 시위에 합류
징역 4개월 옥고…89년 뒤 독립유공자로 인정

 

1919년 3월 말 경남 마산의 부산감옥 마산분감 안팎에서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대한독립만세.”

 

감옥 밖에서는 만세운동 과정에서 붙잡혀 수감된 사람들을 석방하라며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쳤고, 철창 안에 갇혀 있던 독립운동가들도 이에 화답했다.

 

감옥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에서 만세 함성이 이어지던 그때 뜻밖의 사람이 시위대에 가세했다.

 

시민도, 감옥에 갇혀 있던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다.

 

이들을 관리하는 부산감옥 마산분감의 조선인 교도관 박광연(朴光淵)이었다.

 

박광연은 자신이 입고 있던 교도관 제복을 벗어던지고 시위대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를 본 군중들은 환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박광연은 1889년 4월6일 경남 마산부 외서면 동성리, 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1919년 3·1운동 당시 마산부 오동리에 있던 부산감옥 마산분감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산감옥 마산분감은 마산경찰서 유치장을 빌려 감방으로 사용했으며 1913년 별도의 부지를 마련해 신축 이전했다.

 

당시 청사와 중앙간수소, 감방 2개 동, 공장, 구치감, 여감 등이 들어섰고 구내 면적은 2000여 평이었다. 이후 1923년 5월 부산형무소 마산지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1919년 3월이 되자 마산분감의 상황은 달라졌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마산뿐 아니라 함안·고성·창녕 등 경남 각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붙잡힌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마산분감에 수감됐다.

 

마산에서도 3월 내내 만세 함성이 이어졌다. 3월3일 무학산에서 김용환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홀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후 구마산 장날을 중심으로 대규모 만세운동이 잇따랐다.

 

마산지역 만세운동이 거세지면서 시위대의 발길은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있던 마산분감으로도 향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 따르면 1919년 3월31일 장날을 맞아 구마산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시위대가 북마산 도로를 따라 마산분감까지 행진했다.

 

이들은 감옥을 둘러싸고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감옥 안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산분감에 갇혀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밖에서 들려오는 시위대의 외침에 화답해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도관 가운데 박광연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신병을 관리해야 하는 현직이였다. 하지만 이날 박광연은 입고 있던 제복을 벗어던진 뒤 감옥 밖 시위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선택에는 곧바로 대가가 따랐다.

 

박광연은 만세시위에 참가한 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고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은 1919년 5월15일 박광연에게 징역 4개월을 선고했다.

 

출소 후 그는 광복 후인 1956년 12월6일 세상을 떠났다. 1919년 제복을 벗고 독립만세를 외친 지 37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정부는 2008년 박광연의 3·1운동 공훈을 인정해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한 지 89년 만이었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감옥은 독립을 외친 사람들을 가두는 공간이었다. 박광연은 바로 그 감옥을 지키는 교도관이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말, 감옥 밖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석방하라는 함성이 울려 퍼지고 철창 안에서도 이에 화답하는 만세 소리가 이어지자 그는 제복을 벗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키던 감옥 밖으로 나가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감옥을 지키던 교도관은 그렇게 독립운동가가 됐다. 일제가 입힌 제복을 벗고 시위대 속으로 뛰어든 그날의 선택은 89년 뒤 대한민국이 인정한 독립운동의 기록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