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20일 새벽 3시쯤 부산교도소. 무기수 신창원은 수용실 화장실 환기구의 쇠창살을 잘라내고 가로 32㎝, 세로 28㎝가량의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교도소 담장 밖으로 빠져나온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신창원은 좁은 환기구를 통과하기 위해 두 달가량 식사량을 줄이며 몸무게를 15㎏ 가까이 감량한 것으로 알려졌다.
쇠톱날로 쇠창살을 조금씩 자르면서 절단 부위를 감춰 교도관들의 눈도 피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도피는 2년 6개월, 정확히 907일 동안 이어졌다.
경찰은 전국에 수배망을 펼치고 헬리콥터와 전경까지 투입했다.
현상금은 처음 5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올랐지만 신창원은 여러 차례 경찰과 마주치고도 검거 직전 달아났다. 경찰의 추적이 거세질수록 그의 이름은 오히려 더 널리 알려졌다.
결국 그가 붙잡힌 것은 형사도, 대규모 검거반도 아닌 가스레인지 수리기사의 눈썰미 때문이었다.
가난과 절도로 얼룩진 어린 시절
신창원은 1967년 5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읜 뒤 가난과 불안정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뒀다.
그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초등학교 교사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던 일을 꺼냈다.
“선생님이 머리를 한 번만 쓰다듬으며 ‘착한 놈’이라고 해줬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학교에서 쫓겨났을 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그러나 불우한 성장 과정이 그가 저지른 범죄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가출과 절도를 반복했고 소년원을 거쳐 교도소까지 드나들었다. 음식점 배달원 등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다시 범죄에 손을 댔고 절도로 실형을 선고받고 출소하기를 되풀이하면서 범행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1989년 3월 신창원은 공범들과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강도 범행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공범이 피해자를 살해했고 신창원은 도주했다가 그해 9월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붙잡혔다.
법원은 강도치사와 강도상해, 특수강도, 상습절도 등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후 항소심에서도 형이 유지됐고 1990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범행 현장에서 직접 흉기를 휘두르지 않았더라도 강도 범행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 이상 사망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무기수가 된 신창원은 서울구치소를 거쳐 대구·전주·대전·청송 등 여러 교정시설을 옮겨 다녔다. 1994년 11월 부산교도소로 이감된 뒤에는 교도소 안 공사에 투입됐다.
신창원은 이때 탈옥을 준비하기로 마음먹고 쇠톱날을 손에 넣은 뒤 수용실 화장실 환기구의 쇠창살을 매일 조금씩 잘랐다.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절단 부위를 감춰놓았다가 1997년 1월 20일 새벽 환기구를 빠져나갔다.
조사 결과 수용동을 벗어난 그는 교도소 안 교회 신축공사 현장에 몸을 숨긴 뒤 땅을 파 담장을 통과했다.
무기수 한 명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교도소 밖으로 사라졌다는 소식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교정당국은 탈옥 사실을 확인하고 비상경계에 들어갔고 경찰도 주요 도로와 터미널, 역에 검문망을 펼쳤다. 그러나 신창원은 이미 추적 범위를 벗어난 뒤였다.
총 맞고도 달아난 탈옥수
신창원은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 등 전국을 오가며 빈집과 상점에 침입해 도피 자금을 마련했다.
경찰은 그가 도피 기간 훔친 금품이 9억여원에 이르렀다. 그는 훔친 돈으로 차량을 구하고 신분을 위장했으며, 여성들과 동거하면서 은신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수사망이 좁혀질 때마다 다시 거처를 옮겼고 붙잡힐 뻔한 순간도 여러 차례였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달아났고 총상을 입고도 추적을 따돌렸다. 경찰이 은신처를 덮치면 창문이나 옥상, 건물 사이를 이용해 빠져나갔다.
신창원을 눈앞에서 놓치는 일이 반복되자 경찰의 검거 능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고도 탈옥수 한 명을 붙잡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일부 시민은 그를 권력과 경찰을 조롱하는 ‘홍길동’에 빗댔다.
하지만 그가 도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돈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집과 가게에서 훔친 것이었다. 집에 침입당한 피해자들은 금품을 잃었고, 경찰과 맞닥뜨리는 과정에서는 인명피해가 발생할 위험도 컸다.
가스레인지 수리기사가 알아본 얼굴
907일간 이어진 도피는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끝났다.
1999년 7월 가스레인지 수리기사가 순천시 금당대주아파트의 한 가정을 방문했다.
집 안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전국에 붙은 수배전단에서 수없이 봤던 신창원과 닮아 있었다. 수리기사는 집을 나온 뒤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7월 16일 아파트를 급습했다. 신창원은 더 이상 달아나지 못하고 붙잡혔다. 부산교도소를 빠져나간 지 2년 6개월 만이었다.
검거 소식은 곧바로 전국에 전해졌다.
그가 체포될 당시 입고 있던 화려한 무늬의 티셔츠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비슷한 디자인의 옷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신창원 티셔츠’라는 말까지 생겼다. 범죄자의 옷차림이 유행 상품으로 소비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책과 만화가 나오고 팬카페까지 만들어졌다.
일부에서는 그를 ‘희대의 탈옥수’나 ‘신출귀몰한 도망자’로 포장했다.
수차례 검거망을 뚫은 도주 능력과 불우한 성장 과정이 부각되면서 강도치사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형자라는 사실은 뒤로 밀렸다.
재판에 넘겨진 신창원에게는 탈옥과 도피 중 저지른 절도·강도 등의 책임까지 더해졌다. 법원은 기존 무기징역과 별도로 징역 22년6개월을 선고했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 그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2004년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잇따라 합격했고 법률도 공부했다. 교도소의 서신 발송 제한과 정보공개 거부 처분을 문제 삼아 직접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후 신창원의 수용생활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2011년 8월 경북북부제1교도소 독거실에서 고무장갑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은 뒤 회복했다. 당시 교정당국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신창원이 심리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탈옥 이후 세월이 흘렀지만 신창원은 여전히 교도소에 있다.
907일간의 도피는 한 탈옥수의 대담한 모험이 아니었다. 교도소의 허술한 보안과 경찰의 반복된 검거 실패, 범죄자를 영웅처럼 소비한 사회의 시선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