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가 범죄인가

  • 등록 2025.03.17 16:3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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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 관련 사건을 보면 무엇이 진심인지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정말 사랑이었는지, 일방적인 집착이었는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폭력이었는지, 아니면 관계의 해석이 엇갈린 것인지. 사건마다 실체와 정황은 모두 다르다. 같은 ‘강간’이라는 죄명이 붙어도 내용은 제각각이다.

 

물론 실제로 강압과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그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일부 사건에서는 관계의 실체와 동의 여부를 둘러싼 진실을 법정에서 치열하게 검증해야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얼마 전 나를 찾아온 의뢰인은 성형외과 의사였다. 고소 내용은 단순했다. “프로포폴을 놓고 강제로 범했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강간 및 강제추행 사건으로 입건된 상황이었다.

 

그의 설명은 달랐다. 병원에서 일하던 여성이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사귀자고 한 것도, 프로포폴을 놔 달라고 요구한 것도 상대방이었다는 것이다. 관계를 끊으려 하면 극단적인 표현을 하며 매달렸고, 자신도 그 관계를 사랑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의 말은 절실했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의뢰인의 편이면서 동시에 가장 냉정한 질문자가 되어야 했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회의실을 나가면 저는 당신 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제가 가장 날카로운 의심을 던질 겁니다. 법정에서는 더 가혹한 질문이 쏟아질 테니까요.”

 

변호인의 역할은 단순히 공감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정에서 버틸 수 있는 논리를 만드는 사람이다. 특히 성범죄 사건은 진술의 신빙성이 핵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관계의 전후 사정, 대화의 맥락, 사건 직후의 태도까지 모두 재구성해야 한다.

 

우리는 남아 있는 문자메시지와 녹취 파일을 정리했다. 날짜별로 관계의 흐름을 정리했고, 고소인이 주장하는 피해 시점 전후의 대화와 행동을 시간순으로 배열했다. 수사기관은 사안의 중대성을 이유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피해자의 진술이 강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장은 기각됐다. 이후 추가 조사가 이어졌고, 영장 신청이 반복됐지만 결과는 같았다. 최종적으로 무혐의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나는 이 사건에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확신은 감정이 아니라 증거에서 나와야 한다. 형사사법의 기본 원칙은 무죄추정이다. 유죄는 증거로 입증되어야 하고, 합리적 의심이 남는다면 그 의심은 피의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성범죄 사건은 특히 어렵다. 관계가 있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 관계가 동의에 기초했는지가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의는 말 한마디로 단정되지 않는다. 그 전후의 맥락, 반복된 대화, 행동의 일관성, 이후의 태도까지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그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동시에 형사절차는 무고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설계돼 있다. 두 가치 사이의 긴장은 늘 존재한다.

 

나는 늘 법학교실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이를 만들지 말라.” 이 말은 범죄를 가볍게 보라는 뜻이 아니다. 국가의 형벌권은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변호사는 사건의 진실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국가가 행사하는 형벌권이 증거와 절차에 따라 행사되는지 끝까지 묻는 사람이다. 감정이 아닌 증거로, 추측이 아닌 사실로 판단받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다.

 

성 관련 사건을 접할 때마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무엇이 진심이었는지는 결국 법정에서 증거로 말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 그것이 변호인의 자리다.

박세희 변호사 soon@tsisa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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