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형자에게 주어지는 가석방이 형식적 기준을 넘어 사실상 ‘범죄 낙인제도’로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고위험 범죄자로 분류된 수형자들은 형기의 90% 이상을 마쳐도 가석방 대상에서 반복적으로 탈락하는 사례가 나타나면서 형평성 논란이 커지고 있다.
28일 법무부 ‘가석방 업무지침’에 따르면 ▲살인 및 존속살해 ▲강도 ▲성폭력처벌법 위반 ▲조직폭력 ▲20억 원 이상 피해 미합의 사범 ▲형기종료 후 1년 내 재범 ▲가석방 후 3년 내 재범 ▲수용 중 징벌자 ▲가석방기간 중 징벌자 등 은 ‘제한사범’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은 형집행률 90% 이상, 교정 재범예측지표 2등급 이상, 경비처우등급 S1급을 충족해도 가석방에 탈락하거나 보류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한 번 심사에서 탈락하면 다음 정기심사까지 가석방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없기에 이같은 현행 방식이 수형자들의 재사회화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석방 심사 회의록에 따르면 제한사범 그룹에서도 형기의 90% 이상을 채운 수형자들이 가석방되지 못하는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제한사범 중 상당수는 형기 대부분을 마친 후에야 겨우 적격 판정을 얻거나 탈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가석방 심의록에 따르면 수형자들은 보호사범, 일반사범, 제한사범, 강력사범으로 구분돼 심사를 받았으며, 보호사범은 형기의 60% 수준만 채워도 가석방 심사 대상에 오를 수 있었다. 보호사범 그룹에는 고령자, 장애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형기의 60%를 채우면 대부분 가석방이 허용됐다.
반면 제한사범의 경우 형기의 82% 이상을 채운 경우에도 신중 검토 대상 혹은 보류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특히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A 씨의 경우 형기의 97.9%를 채웠음에도 건강 악화(간암 말기)라는 특별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가석방이 어려웠던 사례로 꼽힌다. 반면 대기업 회장 B 씨는 계열사 자금 120억 원을 횡령하고 형기의 85.8%를 채운 상태에서 피해액 전액 변제와 추징금 완납을 근거로 가석방이 허용됐다. 법무부는 사회적 물의를 고려해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했으나, 위원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B 씨는 가석방됐다. 같은 계열 부회장 C 씨도 75억 원 횡령 후 84.9%를 채운 상태에서 가석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러한 사례는 보호사범은 60%, 경제사범은 80%대 형집행률로 가석방되는 반면, 제한사범은 90% 이상 형기를 채워도 보류되거나 탈락하는 ‘죄명에 따른 이중잣대’를 부각시키고 있다. 형의 집행률 외에도 ‘재범 예측지표’, ‘경비처우급’, ‘피해자 합의 여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가석방 심사가 교정성과나 재범 위험성보다는 사회적 이미지와 사건의 성격에 좌우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헌법재판소는 1995년과 2010년 결정에서 “가석방은 수형자의 주관적 권리가 아니라 형사정책적 재량에 따른 조치”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재량이 지나치게 일률화되고, 죄명별로 사실상 가석방 기회를 차단하는 방향으로 운영된다면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과 형사정책의 합리성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법무법인 JK 김수엽 대표 변호사는 “가석방은 ‘형기의 일부를 사회 내 통제 아래 이행하도록 하는 제도’이지 죄명에 따라 부당한 낙인을 찍는 수단이 아니어야 한다”며 “가석방제도 본래의 취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가석방심사위원회는 범죄 동기, 교정 성적, 건강 상태, 생계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죄명 자체를 심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관행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