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규의 수사반장 (19화) 형사 J가 받은 한 통의 전화

  • 등록 2025.05.02 16:3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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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발견된 10대 女 변사자
뉴스 보고 모친이 직접 전화해
가출팸들과 원룸에서 지내오다
함께 생활하던 10대 男이 범행

사건을 해결할 어떤 단서도 없어 미궁에 빠졌을 때 때론 한 통의 전화가 탈출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2010년, 경기 고양경찰서 강력5팀 팀장이었던 형사 J는 고양시 일대를 충격에 빠뜨린 한 살인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하지만 범인은커녕 변사자의 신원을 특정하지도 못해 수사는 난항에 빠져 있었다. 그때 형사 J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사건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사건의 시작은 2010년 2월 3일, 경기 고양시의 한 공원이었다. 아직 봄기운도 돌지 않았던 늦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어디선가 참을 수 없는 악취가 공원 주변을 맴돌았다. 공원은 아파트 단지와 멀지 않은 곳이었고 근처 교회의 교인들도 자주 나와 보는 곳이었다. 그날도 교인들은 공원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더욱 심해진 냄새가 교인들의 코를 찔렀다. 무언가 썩어가는 지독한 냄새였다. 결국 사람들은 악취의 근원을 찾아 공원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누군가 무심코 시선을 내렸던 어느 순간, 수북이 쌓인 낙엽 아래서 하얀 무언가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손이었다.

 


신고를 받은 고양경찰서 강력5팀이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팀장이었던 형사 J는 평소에도 그 공원을 지나칠 때마다 묘한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아파트와 가까운 위치였지만 공원의 규모가 꽤 컸고, 나무들이 우거지며 곳곳에 외지고 음침한 곳들이 많았다. 흡사 어느 야산의 자락처럼 사체를 암매장하기 좋은 곳이었고 CCTV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은 청 반바지를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온전하지 않았다. 바지 속 속옷이 벗겨져 있어 수사팀은 성폭행 후 살인이라는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피해자의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고 사체의 부패가 심해 지문 재취도 쉽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과학수사팀은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지문 채취에 성공했다. 지문을 통해 피해자의 신분을 찾아가려는 찰나, 수사팀에 당황스러운 부검 결과가 도착했다. 성범죄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의 성기, 속옷, 청 반바지 어디에도 정액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수사팀은 용의자가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사체 주변에 있던 담배꽁초를 수거해 DNA 감식을 의뢰했다.


어떻게든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려던 수사팀은 부검 결과에 이어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아주 어렵게 지문 채취에 성공하고도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문을 전산에 대조했지만 어떤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유는 피해자가 아직 주민등록조차 하지 않은 청소년이었던 것이었다. 주민들의 신고로 수사가 시작된 사건인 만큼 이 사건에 대한 소문은 지역 사회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문이 어찌나 빨랐는지 시체를 검안하고 사건 현장을 감식하는 순간에 기자들까지 몰려와 사진을 찍고 취재하기에 바빴다.

 


형사 J는 수사팀과 함께 고양시 전역의 실종 신고와 가출청소년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확보된 명단을 토대로 비슷한 용모와 옷차림의 여학생을 찾아봤지만 비슷한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팀은 근처 파주와 일산은 물론 서울 은평구 일대까지 수사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 사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언론은 점점 공격적인 논조로 변해갔다. 일주일 넘게 성과가 없자 수사팀을 향한 비난의 여론이 높아졌다. 형사 J는 대중의 비판을 묵묵히 견뎌내며 수사를 이어갔다. 정작 그가 견디기 힘든 건 대중의 비판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피해자의 신원과 보이지 않는 범인이었다. 피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밝혀내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는 상황이 꼭 어두운 미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고양경찰서 강력5팀의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민원 전화처럼 여겨졌지만, 그 한 통이 막다른 미궁에 갇혀있던 이 사건의 출구가 되리라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TV 뉴스를 통해 변사 사건을 접했다며 울먹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변사자가 자신의 딸 A 양(가명, 16세)인 것 같다고 했다. 형사 J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능하다면 경찰서를 직접 방문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날 오후, 서울 신림동에 거주하는 A 양의 어머니가 고양경찰서로 찾아왔다. A 양의 어머니는 자신이 딸의 휴대폰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시신 주변에 휴대폰이 없었을 것이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양경찰서는 A 양의 어머니의 구강세포를 재취해 변사자의 DNA와 대조했다. 두 사람은 모녀 관계였다.


A 양은 서울 신림동에서 살던 집에서 가출한 후 고양시에 위치한 친구 B 양(10대 중반)의 원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A 양이 사귀던 남자 친구 C 군(10대 중반)은 여전히 신림동에 살고 있었다. 수사팀이 수사 차원에서 C 군을 만났지만 범죄 혐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오히려 연락되지 않는 A 양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었고, A 양의 어머니에게 실종신고를 해보자고 권유했던 장본인이었다. 수사팀은 고양시 일대를 뒤져 B 양의 원룸을 찾아냈다. 그곳은 일명 가출팸이라 부르는 가출청소년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간이었고 공원과도 인접한 곳이었다. 원룸 하나에 최소 네 명이 상이 함께 살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A 양과 B 양 말고도 두 명의 10대 남성 청소년들이 함께 생활했었으나 수사팀이 방문했을 때는 B 양은 물론 다른 멤버들도 모두 떠난 뒤였다.

 


수사팀은 발품을 팔아 어렵게 B 양의 연락처를 확보했다. B 양은 가출팸 멤버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진 채 현재는 서울 신림동에서 저주 중이었다. B 양이 A 양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은 사건 발생 열흘 전으로, 그날 A 양과 B 양 그리고 가출팸이었던 D 군(10대 중반)이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고 했다. 화장실이 급해진 B 양이 공원 화장실을 쓰려다 너무 더러워 숙소에 다녀오는 사이 공원에 남아 있던 두 사람이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B 양이 기억하는 친구 A 양을 본 마지막 날이었다.


이 증언은 수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수사팀은 곧바로 B 양을 통해 D 군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이를 근거로 주소지까지 파악했다. D 군 또한 고양시를 떠났고 현재 하남시의 한 치킨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정보도 접수했다. 수사팀은 D 군의 주거지 인근에서 잠복하다가 10월 26일, 배달을 위해 오토바이에 올라타려던 D 군을 전격 검거했다. 사건 발생 11일 만의 체포였다.


체포되어 경찰서로 이송된 D 군의 태도는 충격적이었다.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고 당당하게 굴었다. A 양과 마지막으로 본 것이 한 달 전이라는 태연한 거짓말도 서슴없이 했다. 수사팀은 A 양의 시신 근처에 있던 담배꽁초에서 나온 DNA와 D 군의 DNA를 비교했고, 완벽히 일치하는 결과를 확보해 두었다.


수사팀의 끈질긴 추궁과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오자 결국 D 군은 A 양 살해 혐의를 인정했다. D 군에 따르면 A 양과는 애초부터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일산의 가출팸 숙소에서 생활하는 내내 사소한 말에도 쉽게 부딪혔다. 말다툼은 일상이었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건 당일도 마찬가지였다. B 양이 숙소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두 사람은 공원의 한 잣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가 시비가 붙었다. 그러던 중 A 양이 D 군이 머리채를 움켜쥐었고 D 군은 A 양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바지를 무릎까지 벗겨버리게 된다.

 

그래도 A 양은 D 군의 머리를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았다. 감정이 폭주한 D 군은 A 양을 밀쳐 넘어뜨린 뒤 그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A 양은 끝까지 D 군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A 양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고 D 군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A 양의 숨이 끊어졌다는 걸 인지한 순간, D 군은 겁이 났다고 했다. 패닉에 빠진 D 군은 먼저 A 양의 벗겨진 바지를 다시 올려주고 으슥한 곳으로 사체를 옮긴 뒤 잣나무 가지와 낙엽을 덮어 놓았다. 잠시 후 B 양이 공원으로 돌아와 A 양을 찾았지만 D 군은 A 양이 숙소로 돌아갔다며 둘러댔다. B 양은 그날 밤 숙소로 A 양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전에도 종종 며칠씩 혼자 잠적했다가 돌아오는 일이 있었기에 죽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형사 J는 이후 B 양의 진술과 사건 전후 행적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B 양이 범행에 가담하거나 방조한 정황이 없음을 확인했다. 수사팀은 이 사건을 D 군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지었다.


사건을 마무리한 뒤, 형사 J는 수사 기록을 정리하며 이 사건이 얼마나 어려운 사건이었는지를 다시금 실감했다. 범행 현장은 넓은 공원이었고 CCTV조차 없었다. 범인과 피해자 모두 가출청소년이었으며 지문 조회를 할 수 없는 나이였다. 더구나 실제 연고지와 전혀 무관한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짤막한 뉴스 보도를 보고 딸의 사건임을 직감한 어머니의 제보 전화가 아니었다면 이 미로를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을 일이었다. 만약 그때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형사 J는 여전히 답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박진규 작가 cjssadfeh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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