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11월 5일 새벽, 제주 북초등학교 인근에 세워진 차량에서 한 남성이 피살된 채 발견됐다. 변호사 이승용 씨였다. 그는 서울지검, 부산지검 등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 1992년 고향인 제주로 내려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 7년 만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 변호사의 시신에는 심장을 관통할 정도로 예리한 흉기가 사용된 흔적이 있었다. 당시 경찰은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용의자 특정에 나섰지만, 범인은 물론,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파악하지 못했다. 1년 뒤 수사본부마저 해체되었고 이 변호사 살인 사건은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지난 2021년,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22년 만에 이승용 변호사 살인 사건 피의자가 경찰에 체포됐다.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건 한 방송이었다. 앞선 2016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 변호사 살인사건을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으로 보고 제보를 받기 시작했지만 결정적 제보가 없어 취재를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던 중 2019년, 캄보디아에서 체류 중이던 김모씨가 해당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며 직접 연락해 온 것이었다.
제작진을 만난 김씨는 본인이 제주 폭력 조직 유탁파 행동대원이었다고 소개하며 사건 당시 두목의 범행 지시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이 변호사 살해를 교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찰이 특정하지 못했던 흉기를 손수 그려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그려낸 흉기는 얇고 좁게 갈아낸 칼이었다. 김씨를 만난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은 그의 자백을 범죄심리학자들과 심층 분석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이 변호사의 살해 현장에 김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었다.
제작진은 김씨의 인터뷰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은 2회 분량의 방송을 내보냈고, 이를 본 수사기관이 재수사를 결정하며 김씨에 인터폴 적색수배를 내렸다. 방송 직후 김씨는 제작진과의 통화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설령 본인이 이 변호사를 죽인 범인이라고 해도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처벌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김씨는 자신의 인터뷰를 내보낸 제작진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1999년 발생한 이승용 변호사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2014년 11월 4일까지였다. 김씨는 사건의 공소시효를 계산하고 자백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체포될 수 있었을까? 2015년 이른바 ‘태완이법’으로 불린 형사소송법이 개정, 시행되며 살인과 살인교사 등의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됐고, 형사소송법 제235조에 의하면 범인이 형사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국외 도피 시 공소시효는 해외 체류 기간만큼 정지된다.

해외에 있던 김씨는 이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파악된다. 경찰은 김씨의 출입국 기록을 확인해 그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도피했다는 증거까지 확보하고 불법체류 혐의로 캄보디아에서 추방된 김씨를 제주공항으로 압송, 살인 공범으로 기소했다.
2022년 2월, 사건 발생 23년 만에 이 변호사 살인 사건에 대한 1심 재판이 열렸다. 결과는 무죄. 1심은 “피고인이 한 방송에서 밝힌 제보 진술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고, 제출된 증거 중 상당 부분은 가능성과 추정일 뿐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시하며 무죄로 봤다. 하지만 김씨가 방송 제작진을 협박한 혐의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검찰과 김씨 모두 항소해 5개월 뒤 열린 항소심에선 결과가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가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을 미필적으로 인식하고 실행 행위를 분담했다고 보고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판결에 불복한 김씨가 상고하며 사건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려야 했다.
2023년 1월, 긴 미제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마침내 나왔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제보 진술과 정황 증거만으로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은 형사 재판에서 요구되는 증명의 정도, 진술 신빙성의 판단, 살인죄의 고의 및 공모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다”고 판시하며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파기환송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며 이승용 변호사 살인 사건은 다시 범인을 잡지 못한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이후 김씨는 협박 혐의에 대한 형량을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