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그대에게 프로포즈 하기로 마음먹은날 당신은 다가오는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말 한마디 없이 다른 섬으로 떠났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나요 외롭다고 슬프다고 힘들다고 떠나버린 배에 작살을 던져보지만 뱃고동 소리 울리며 더 멀리 나아가기만 합니다 침묵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안녕하세요. THE 시사법률 담당자님! 프로포즈를 2일 남기고 경찰에 체포되어 떠난 그녀를 생 각하며 쓴 시입니다. 그녀도 제가 쓴 시를 볼 수 있을까요? ○○○교
서울구치소에 있던 컵라면 코로나가 한창일 때 구속되어 독방에 갇혔던 때가 기억 나요. 그 기분 아세요? 인생 첫 구속의 기분이요. 소중한 사람들과의 단절이 특히 괴로웠어요.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것이라 하던데, 진짜 그래요. 죄인은 괴로운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났다가 이어서, 얼 룩은 닦여야 하듯 나도 사라져야 하는거 아닌가 하느 생 각이 났어요. 방안을 둘러보니, 옷걸이봉은 잘 부러지는 플라스틱 이 고요. 화장실 문고리는 아무것도 걸 수 없는 모양이에요. 수납장엔… 이게 뭐죠? 컵라면이 있네요? 그 위에 쪽지가 있어요. 읽어보니, 정신없고 입맛도 없으실텐데 이거라도 드시라 고 적혀있어요. 너무 비현실적이라 한참동안 쪽지랑 라면을 만지작 거리며 봤던 기억이 나요. 여긴 감옥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면서요. 이 자리를 빌어 그분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서울구치소의 격리방 에 라면과 쪽지를 남겨두신 그 따뜻한 마 음 참 감사했습니다. 제가 느낀 감동이 이 어지길 바라며 저도 남겨두었는데 지금도 어디선가 이어지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To. THE 시사법률 품 36.5 담당자님 덕분에 좋은 기억 다시 꺼내봐서 좋았습니 다.
강간술래 교도소에서는 드물게 말끔하게 생긴 소지 들을 만난다. 나는 그 중 한명과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 : 야, 너는 잘생겨가지고 여기 왜 들어왔어? 소지 : 성 문제로요. 나 : 강간죄 이런거? 소지 : 예, 근데 강간이 아닌데 여자친구가 고소해가 지고 제가 사과했거든요, 그랬는데도 징역 먹었어요. 나 : 너가 정말 강간 안했다면 끝까지 무죄주장을 했어야 지 사과를 왜 해 소지 : 민사도 걸려서 돈도 물어주고 했는데 저도 지금은 사과한게 후회됩니다. 이 소지는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는데 외모나 언행도 필요이상으로 단정하여 교도관 및 재소자들로부터 평판 이 좋았다. 그 주장 그대로 믿자면 상당히 억울해 보인다. 사과는 감형의 요건도 되지만 유죄 인정의 증거도 된다. 나는 사회에 있을 때 모텔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CCTV 녹화 영상이 필요하다는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개인정보 보호문제를 핑계로 그 부탁을 거절하였 다. 그랬더니 수화기 너머 그 남자는 애원하듯 내게 말하 였다. “제가 경찰공무원 시험 합격해서 곧 임관을 앞두고 있는 데 성 범죄자로 몰리게 생겼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형님.” 울먹이는 듯 한 그의
안녕하세요 :) ○○○입니다. 독자평이랄까요? 넘 애정하다보니 편지를 또 드리고 싶 네요. 먼저, ‘품 36.5도’가 참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법무부장관님, 교정본부장님께 드리는 글’ 이 참 좋았어요. 많이 절제되어 있고, 여러번의 낙망속에 서도, 26년이라는 시간속에서도 지금도 처우 심사를 받 고자 하시는 모습이 어떤 죄를 지신 것인지는 모르겠지 만 기회를 드리라고 탄원서라도 넣고 싶은 심정이네요. 그 다음 품 36.5도에 삽입된 벚꽃이 너무 예뻐서 재판부 에 감사의 글 쓸 때 붙여서 냈어요. 담장 안에서는 벚꽃길 을 감상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사진으로라도 너무 예쁜 벚 꽃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알뜰하게 깨알 글씨로 안내해 주시는 보라미방송 편성표 도 감사하고, 저도 산책하다가 복권 구매를 하려면 일단 출소를 해야 할텐데요!!!ㅋㅋㅋ 스포츠면은 남성분들이 보시는거 같아 패스하고요. ㅋㅋㅋ BOOKS! 너~무 좋습니다. 주간 베스트 보고서 책 몇권 구입해서 봤어요. 특히 헌법 이요! 대한민국 헌법 포켓북 샀는데 세상에 영어로도 럭 셔리하게 되어 있더라구요 우리나라의 제일 문제는요! 1조를 안지키는게 아니라, 7조를 안지키는거에요!!! “All publ
북녘 땅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몰아치는 눈보라의 찬 기운이 유난하게 시려 오는 담장 안의 이 겨울은 외롭고도 서러워라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철창 밖에 두고 온 삶 그립고 또 그리워라 푸념 섞어 숨을 뱉어 다시 한 번 힘을 내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 겨울을 안아 본다 지난날의 어긋난 날 후회하며 반성하며 오랫동안 내 맘밭에 자리 잡은 쓴 뿌리를 뽑아내고 갈아엎어 좋은 씨앗 흩어 뿌려 따뜻한 봄 맞을 날을 두 손 모아 고대하리 ○○○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너의 얼굴을 문득 그려 본다. 미소 짓는 너의 얼굴이 흩날리는 눈꽃 사이로 너는 날 보며 웃는 듯하다. 눈꽃 같은 나의 사랑아, 나와 사랑을 하는 너의 모습이 새하얀 눈꽃처럼 예쁘고 아름답게 비친다. 내 사랑아, 눈이 오는 날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냐”고 새하얀 눈꽃을 보며 적는다. 너에게 사랑한다고, 님이 너무 보고 싶다고 흩날리는 눈에 띄워 너에게 전한다. 내 마음이 너에게 닿기를 바라며… 2027년 9월 19일 결혼을 약속한 아내 최나래에 게 남편 상식 드림 ○○○교
존경하는 장관님, 청장님께 깊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올립니다. 저는 26년째 수용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무기수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은 죄의 무게를 가슴에 새기며, 오직 한 가지 희망—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 루를 살아왔습니다. 저는 중학교 졸업도 못한 상태로 수 감되었지만, 이후 검정고시 합격, 방송통신대 재학, 수십 개의 상장과 자격증 취득 등 자기계발에 전념해 왔습니 다. 더불어 법무부 소속으로 전국기능경기대회에도 출전 해 입상한 바 있습니다. 그간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7년 전부터 최상위 등급인 S1·R1 등급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단 한 번의 징 계 없이 규율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중 관리대상자’라는 분류 하나만으로 모든 처우 심사에서 자동 제외되고 있다는 현실 앞에 절망을 느낍니다. 자율사동, 중간처우의 집, 희망센터, 자립금 지급, 확대 전화처우, 가족 접견 기회 등은 모두 재범 방지와 사회 복 귀를 위한 제도입니다. 그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죄명만이 아닌 수형생활의 실제 행적을 기준으로 일정 기준 이상 을 충족한 엄중관리대상자에 한해서는 최소한 심사의 기 회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환한 대낮, 암막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홀로 빛나는 컴 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훌쩍거렸다. “왜 나는 매번 떨어지는 걸까? 이대로 취업 한 번 해보지 못하는 걸까?” 온갖 비관적인 생각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방바닥 한가운데 누워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벌컥— 엄마는 늘 그렇듯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아~ 왜 또!”라며 이불 안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내 귀만 아팠다. 어둠을 뚫고 방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엄마는 이 불을 확 걷었다. “일 나라!” 방문 너머 비치는 거실 전등 불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거실로 나가자 검은 비닐봉지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엄마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치 냉장고를 열어 김치통을 꺼내고, 싱크대에 물을 받 아 상추와 깻잎을 담그며 말했다. “삼겹살 3만 원어치 사 왔다! 먹자!”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나는 잔뜩 신난 듯한 엄마가 아니꼽게 보였다. 명치가 아플 정도로 속에 꽉 찬 이 답답함을 불효막심하 게도 엄마에게 풀 심산이었다. 그때, 저절로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는 장면을 보았다. 엄마가 갑자기 허공에 뒷발차기를 하는 게 아닌가… 육중한 몸매의 엄마가 짧은 다리를 뒤로 뻗어 두어
누구나 어려웠던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시절, 우리 집도 풍파를 비켜가지 못했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 다. 한 지방 대학에 합격한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고, 아빠는 일을 하러 일본으로 떠났다. 엄마는 이것저것 가 리지 않고 일을 다녔다. 엄마가 보내주는 용돈은 아무리 아껴 써도 금방 바닥났 다. 학교생활은 과 대표를 맡을 만큼 적극적이고 재밌게 했다. 하지만 지방대에 다닌다는 열등감이 나를 붙잡았다. ‘더 열심히 공부할걸’ 미련 속에서 1학기를 마치고 집에 올라 왔다. 6월의 초여름, 느즈막한 시간에 한 친구가 날 찾아왔다. 나와 같이 미술학원을 다닌 친구는 좋은 대학에 진학한 후 그 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내게 말했다. “입시 다시 해보는 건 어때?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입시를 또 하라고? 그것도 반수를? 난 자신 없어.” 그렇게 돌아섰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침 아빠도 일을 마 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참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엄마, 아빠에게 무거운 마음을 털 어놓았다. “너는 너밖에 모르니?” “아직도 미술학원비가 80만 원
20여 년 전, 친구들과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 하철에서 어떤 여자 둘이 말을 건네왔다. 모르는 사람들 이었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어찌어찌 이야기 가 오갔다. 내 얼굴에 복이 가득하다던 한 여인이 물었다. “요즘 집에 안 좋은 일 있죠? 그거 본인만 해결할 수 있어 요.” 건강했던 동생이 갑작스레 아프기 시작한 데다 엄마, 아 빠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아 풍전등화일 때였다. 솔깃해 진 나는 겁도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날이 컴컴해진 지 오 래여서 중간에 주저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밑져야 본전 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에선 몇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반겼다. 나는 곧바로 도인처럼 보이는 남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희미하게 켜진 촛불 몇 개, 책상에 펼쳐진 한자 가 득한 책, 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줄 거라는 조상님들 얘 기까지, 모든 것이 내가 잘못된 곳에 왔다는 걸 대변했다. 그제야 빠져나갈 궁리를 했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였다.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어떤 이는 이미 제사상이 차려졌다고 말했다. 제사상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여하튼 조상님을 위한 것이며, 나는 가진 돈 전부를 내놓 은 뒤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