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항소심에서 국선변호인 선정을 신청했으나 법원이 아무런 결정 없이 재판을 진행한 것은 위법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양육비 이행 확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3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배우자와 협의이혼한 뒤 미성년 자녀 2명에 대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아 법원으로부터 이행명령과 감치명령을 받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1년 이내에 양육비 채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양육비를 지급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배달일을 하면서 보증금 40만원에 월세 40만원인 집에 거주하는 등 생활 형편이 어렵다는 내용의 의견서도 제출했다. 그러나 검찰은 A씨가 월 300만~400만원가량을 벌면서도 수입의 상당 부분을 다른 채무를 갚는 데 사용해 양육비를 지급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3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A씨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면서 국선변호인 선정을 청구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신청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채 변호인 없이 심리를 진행했다. 이후 재판부는 항소를 기각하고 A씨를 법정구속했다. 대법원은 항소심의 재판 절차가 형사소송법상 국선변호인 선정 규정을 위반했다고 봤다. 대법원은 "가정 형편 등으로 사선변호인을 선임하기 어렵다는 사유가 충분히 소명됐다"며 "빈곤에 대한 소명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교육 정도와 가족관계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하면 국선변호인을 선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지장을 초래한 절차상 잘못이라고 보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운전 중 경련성 발작을 일으켜 인도에 서 있던 보행자를 치어 숨지게 한 40대 남성이 금고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발작으로 정상적인 운전이 어려워질 가능성을 알고도 운전했다면 사고 당시 의식을 잃었더라도 형사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부산지법 형사12단독 박병주 판사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치사) 혐의로 기소된 A씨(40대)에게 금고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금고형은 교정시설에 수용되지만 징역형과 달리 교도작업 의무가 없다. 다만 수형자가 희망하면 교도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 A씨는 지난해 11월 11일 오후 6시 38분께 부산 동래구의 한 도로에서 승용차를 운전하다 인도에 서 있던 60대 보행자 B씨를 들이받아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사고 당시 A씨는 도로 1차로에 정차해 있던 중 경련성 발작을 일으켰고, 차량이 인도로 돌진하면서 B씨를 덮쳤다. B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오후 9시 46분께 다장기기능부전으로 숨졌다. 조사 결과 A씨는 2000년께 처음 경련성 발작을 경험한 이후 관련 치료를 받아왔으며, 사고 약 3개월 전인 지난해 8월에도 같은 증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의료진은 A씨에게 음주와 수면 부족 등 발작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A씨는 예약된 신경과 외래 진료를 받지 않았고, 사고 이틀 전에도 술을 마신 것으로 조사됐다. A씨 측은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사고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으므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과거 발작 경험만으로 운전을 삼가야 할 주의의무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경련성 발작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의사로부터 고지받지 않더라도 운전자로서 당연히 준수해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라고 설명했다. 이어 "피고인은 발작 증상으로 정상적인 운전을 하지 못할 우려가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도 주의의무를 위반해 운전했다"고 판단했다. 다만 A씨가 범행의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동종 전과나 집행유예를 초과하는 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참작했다. 재판부는 A씨의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해 법정구속하지 않았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사의를 표명한 지 3주가 지났지만 이재명 대통령이 후임 인선을 확정하지 않으면서 청와대 참모진 개편이 늦어지고 있다. 여권에서는 현역 의원부터 전직 고위 공직자까지 여러 인사가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으나, 청와대 조직을 통솔하면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보좌하고 당청 간 소통을 이끌 적임자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 정치권에 따르면 강 비서실장은 지난달 21일 김승원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용혜인 전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잇단 낙마 등 인사 검증 문제를 포함한 국정 운영 전반에 책임을 지겠다며 이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당초 이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마친 뒤 후임 인선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3주가 지나도록 강 비서실장의 거취는 결정되지 않았다. 강 비서실장의 유임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인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공개적으로 사의를 밝힌 만큼 교체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다만 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업무를 계속 수행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후임 인선 시점에 대해 "인사는 대통령의 결심이 서시는 그 순간이 바로 인사 타이밍"이라며 "신중하게 살펴보고 계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차기 비서실장 후보로는 더불어민주당 김영진·한준호·천준호·이해식 의원 등이 거론된다. 한준호 의원은 2022년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의 수행실장을 맡았으며, 천준호 의원은 이 대통령의 민주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다. 김영진 의원은 이 대통령의 오랜 정치적 측근으로, 당내 중진 의원이라는 점에서 조직 통솔과 여권 내부 조정 능력이 강점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현역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하면 의원직 사퇴에 따른 지역구 보궐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여당 의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후보자의 정치적 역량뿐 아니라 국회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외에서는 김경수 청와대 정무특보와 김민기 전 국회사무총장, 이철희·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김영록 전 전남지사와 김두관 전 경남지사 등 광역자치단체장을 지낸 인사들도 하마평에 올라 있다. 이들 중 일부에게는 청와대가 비서실장직 수락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내부에서는 국정 운영의 안정성과 인적 쇄신 효과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후임 비서실장이 기존 참모진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도 인사 검증 문제로 제기된 청와대 쇄신 요구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서실장 교체와 함께 정무수석 등 일부 참모진이 개편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인사 검증 문제에 대한 책임론이 청와대 참모진으로 확대됐던 만큼 후임 비서실장 인선을 계기로 정무·인사 기능을 정비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달 30일 예정된 국회 운영위원회의 청와대 국정감사도 인선 시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후임 비서실장이 국정감사 직전에 임명될 경우 주요 현안을 파악하고 답변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국정감사에서는 장관 후보자들의 잇단 낙마와 청와대 인사 검증 과정 등이 주요 쟁점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어, 해당 기간까지 강 비서실장이 업무를 수행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작용할 수 있다. 여권 관계자는 "실무형 참모라면 당청 장악력이 약할 수 있고, 실세형 비서실장이라면 어느 수준까지 권한을 나눌지가 관심사"라며 "강훈식 실장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만큼 서둘러 후임을 정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적임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범죄를 판단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먼저 믿는 경향이 있다. 마약 압수량이 크게 늘었다는 통계에는 마약 범죄가 그만큼 확산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뇌물로 의심되는 돈이 실제로 오가지 않았다면 처벌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긴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에게도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얼마를 잃었느냐는 질문이다. 숫자와 결과는 명확해 보이고, 복잡한 사건을 이해하기에도 편리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죄의 실체가 언제나 결과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숫자가 실제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아무런 금전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처벌할 만한 행위가 이루어진 경우가 있다. 올해 상반기 마약류 압수량은 1037.3kg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8.2% 증가했다. 같은 기간 마약사범 증가율은 6.2%에 그쳤으니 압수량만 놓고 보면 마약 범죄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마약사범 수 대비 압수량도 약 59g에서 93g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 숫자에는 서로 다른 사정이 담겨 있을 수 있다. 대규모 밀수 사건 한 건이 적발돼도 전체 압수량은 크게 증가하고, 국제 공조를 통해 우리나라를 경유하는 마약을 압수했다면 국내에서 유통되지
10월 9일 한글날이면 우리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문자 체계를 창제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린다. 그러나 한글의 위대함은 글자의 과학성과 독창성에만 있지 않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세종의 ‘애민(愛民)의 마음’을 함께 돌아볼 때, 그 문자가 지닌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그 마음은 백성의 억울함을 듣는 재판과 옥에 갇힌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도 이어졌다. 세종이 직접 지은 『훈민정음』 서문인 어제(御製)에는 새 글자를 만든 뜻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세종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며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 글자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글을 몰라 자신의 뜻과 억울함을 드러내지 못했던 백성에게 표현할 길을 열어주려 한 것이다. 그 길이 재판에서도 필요했다는 점은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에서 드러난다. 그는 한자와 이두의 한계를 지적하며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을 제대로 통하게 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했다(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고 기록했다. 이어 새 문자를 사용하면 송사의 실정을 더욱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한글 창제가 일상의 소통을 넘어 재판
변호사님, 반성문을 많이 쓰면 정말 형이 줄어듭니까?” 변호사 일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고 보는 말이다. 인터넷과 유튜브에는 하루 한 장씩 손글씨로 써야 한다는 조언도 있고, 100장은 채워야 의미가 있다는 말도 있다. 나는 판사 시절 수원지방법원에서 형사재판을 담당하며 많은 반성문을 읽었다. 한두 장으로 끝나는 글도 있었고 책 한 권 분량으로 묶어 낸 글도 있었지만, 분량이 많거나 손글씨가 정갈하다는 이유로 반성이 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짧은 글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알고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며 앞으로 무엇을 바꾸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었을 때 더 주의 깊게 읽었다. 반성문을 쓰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형편부터 떠올린다. 구속되면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지, 직장을 잃으면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갈지,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지 걱정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지만, 그 걱정만으로 글을 채우면 자신이 받을 불이익에 대한 호소가 될 뿐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반성문에서 살폈던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가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라는 말
구치소에 구속된 피고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변호사님, 제 얘기를 판사님이 좀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사정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피고인에게는 유죄와 무죄, 형량을 다투는 일만큼이나 제대로 설명할 기회를 갖는 일이 절실하다. 재판은 공소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 판단하는 절차다. 그러나 기록에 적힌 내용만으로 사건의 경위와 당사자의 사정이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피고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실이 빠져 있기도 하고, 같은 사실을 두고도 수사기관과 피고인의 설명이 달라지기도 한다. 변호인의 역할은 그 차이를 확인하고, 판단에 필요한 사실과 근거를 법정에 전달하는 데 있다. 판사는 여러 사건의 기록을 검토한다. 죄명이 같고 범행 방식이 비슷하더라도 각각의 사건에서 확인해야 할 사실은 다르다. 따라서 변론에서는 무엇이 다퉈지고 있으며, 어떤 증거를 더 살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설명의 길이보다 중요한 것은 주장과 근거가 얼마나 정확하게 연결되는가다. “억울합니다”, “진심입니다”라는 말에는 당사자의 절박함이 담겨 있다. 다만 그 말만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공소장에 적힌 시각에 피고인이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