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구치소에서 재판 진행 중인 닉네임 ‘바보 온달’이라고 합니다. 애인과 같이 재판을 받는 중이라 애인에게 힘을 내라는 뜻에서 사연을 적습니다. 여자 친구는 4층에서, 저는 8층에서 지내는 터라 서로 보지는 못하지만 이 글을 보고서 힘을 냈으면 합니다. 2023년 3월 14일 화이트 데이, 해운대 볼락집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당신의 분홍색 스웨터를 보고 난 첫눈에 반했지. 나와 나이 차이가 열네살이나 되는데 나를 좋아해 줄까 하는 불안감에 안입던 콤비 정장을 입고 사탕을 들고서 당신을 기다렸지. 4차로 방문한 해운대 앞 노래 주점에서 내가 임영웅의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부를 때 등 뒤에 서서 나를 안아 준 당신의 따스함 덕에 우리 사랑이 시작되었어. 2년이란 시간을 함께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당신에게 너무 모자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나와 함께 당신까지 이곳에 들어오게 했다는 죄책감에 힘이 들고 많이 미안할 뿐이야. 있을 때 잘하란 말도 떠오른다. 왜 그렇게 못했을까? 당신을 만난 건 정말 내 인생에 둘도 없을 행운이었어. 소중한 나의 보석 같은 샤랄라 공주님. 꽁꽁 숨겨 주머니에 담아 다니고 싶은 나의 천사님
용찬아,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중학교 1학년 때였지. 난 무척 낯을 많이 가려서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내가 실수로 중심을 잃은 걸 우연히 본 너는 “풋” 하면서 웃었어. 그리고 우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어. 중학교 3학년 때 내 생일에 네가 준 선물, 그리고 너의 츤데레스러움이 아직도 기억난다. 우린 성인이 된 후에도 늘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어. 술도 같이 마시고, 밥도 먹고, PC방도 가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했지. 그런데 내가 참 어리석게도 이상한 데 빠져서 너를 멀리하고, 혼자서 점점 엇나갔어. 그래도 넌 내게 뭐라 하지 않았지. 그리고 난 결국 구속됐고, 너도 이제 날 욕하고 떠날거라 생각했어. 근데 넌 내게 직접 편지도 써주고, 접견도 와줬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음속으론 수십 번을 물었어.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렸지만,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내 10대 초부터 20대를 함께한 친구 용찬아,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미안하고 잘 살길 빈다!
혼자서 자식을 키우는 당신, 당신을 사랑하고 힘들었던 삶도 마냥 좋기만 했어. 2명의 쌍둥이 딸과 아들 셋, 그리고 또 딸을 낳아 키우며 어려움에도 앞만 보며 달려오던 우리였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삶에 사랑이 사라지게 되었어. 사랑 또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지. 나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1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은 뒤로 망연자실한 채 가족을 잃고 밑바닥까지 내려가며 과연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 아이들과 함께한 10년간 그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고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내 삶에 결코 후회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 비록 지금은 이렇게 당신과 여섯 남매를 잊고 살아가야 하지만, 당신, 아이들과 함께했던 그 10년은 나에게는 결코 잊지 못하는 시간이야. 행복했던 그때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아. 형량을 다 마치고 나면 당신은 늙어있고 아이들은 다 커있겠지. 딱 한 번만이라도 당신과 아이들을 다시 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하루 반성과 속죄를 하며 살아가고 있어. 후회 없는 10년을 살게 해준 당신, 그리고 여섯 아이들에게 고마워. 늦었지만 사랑했었다고 전하고 싶어.
안녕하세요. 저는 아직 재판을 받고 있는 미결수입니다. 바깥에 결혼을 약속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들어오게 되어 해당 코너를 통해 사연을 남겨봅니다. 안녕, 자기야. 나야, 집토끼 주인. 결혼식장, 스드메, 예식 날까지 다 잡아놓고 갑자기 구속되어서 자기도 황당했을텐데 바깥에서의 일은 잘 처리해 보겠다고, 어떻게 되든 기다릴 거라고 먼저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 노는 거 좋아하고 술 마시는 거 좋아하는 자기인데, 나 걱정할까 봐 집에서 얌전히 있는 집토끼 할 테니까 나오면 풀어달라던 너…. 매일 편지 써주면서 이걸로 세레나데 할 테니 프러포즈는 나와서 내가 하라던 너…. 여기서 잘 있다가 나가면 내가 프러포즈도 하고, 기다려 준 만큼 잘해줄게. 왕자님처럼 사는 동안 잘 모실게요! 항상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예비 신랑!
저는 눈 내리는 날 구속되어 이곳에서 세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만기출소를 몇 달 남겨두고 있습니다. 체포 당시 주머니에 있던 17000원이 제 전재산이었습니다. 밖에서 저를 수발해 주는 이도 없어 흔히들 말하는 ‘법자’로 지냈습니다. 법자의 징역살이는 비포장길을 달리는 것 같았습니다. ‘거지 자식’이라는 말에 분을 참지 못해 징벌방도 다녀왔습니다. 어느 날 새벽엔가 스스로 너무 부끄럽고 제 신세가 처량해 몰래 화장실에서 펑펑 운 적도 있습니다. 저보다 힘든 환경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펜을 든 이유는 시간은 가더라는 말로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출역공장 막내였던 저는 조장이 되었다가 이젠 반장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시간은 가고, 결국 출소날은 옵니다.
살다 보면 ‘이 흐름을 스스로 끊어버릴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삶이 한순간에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미래를 떠올리면 절벽 끝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1년 6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추가 건으로 인해 다시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날 정신에 살짝 균열이 오더군요. 그 빈틈 사이로 대여 섯 가지의 불건전한 망상들이 팡파르를 울리며 돌진해 들어오는데 내 의지로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TV에서 나오는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명화 ‘흐르는 강물처럼’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봤을 때 20대 였는데 30년이 훌쩍 넘어 젊디젊은 브래드 피트와 다시 마주하게 됐습니다. 당시에 친구들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 열광했었지만 나는 카리스마 넘치는 톰 크루즈에게 매료되어 있던 터라 브래드 피트의 미모는 상대적으로 밋밋하게 느껴졌었 습니다. 덩달아 브래드 피트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영화까지 흡사 간을 하지 않은 매운탕 같은 심심한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었죠.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TV 앞에 바짝 다가가 앉고 말았습니다. 젊음 속에 빛나는
제 나이는 50세입니다. 벌써 세 번째 구속이 되어 힘든 수용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출소할 때마다 굳게 다짐을 했었습니다. 무슨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이곳만큼은 들어오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교도소 정문을 걸어 나가는 순간 굳은 다짐은 빛 바랜 기억처럼 흩어져 버렸고, 다시 나약해진 마음엔 결국 또다시 범죄의 그림자가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재의 비참한 제 모습입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서, 가족을 위해 또는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며 위선 속에 살았습니다. 가족들은 그저 제가 곁에 있어주길 바랐을 뿐이었고, 소중한 것은 언제나 제 곁에 머물러 있었는데 말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절대 꺾이지 않을 마음가짐이나 간절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빈틈이 보이는 순간 들불처럼 번져가는 범죄라는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저는 결국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준 가족들의 믿음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덕분에 두 번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부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서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드시어 오늘보다
친구로 시작해서 연인으로, 부부의 연을 맺어 부족한 남편의 아내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 아이의 엄마로, 직장에서는 빈틈없는 상사로 완벽에 가까웠던 당신. 유학 시절 똑부러지는 성격과 철저한 자기관리, 따뜻한 성품에 반해 내가 여러 번 매달린 끝에 우린 연 애를 했고, 1년 후엔 결혼까지 하게 됐지. 부모님께 절대 손 벌리지 말고, 우리 힘으로 살아내 보자는 생각은 당신이나 나나 같았어. 그래서 월셋집에 살며 밤낮없이 일했던 기억이 나. 그러다 전셋집으로, 자가로, 결국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신도시 아파트로…. 그 집에 들어서던 날의 감격은 아직도 잊지 못해. 그랬던 우리에게 두 천사가 찾아와 주었고, 난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는 사명감을 안은 채 육아와 가사는 뒤로 하고 사업에만 몰두하게 됐어. 그 결과 남들이 보기에는 여유 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됐지만, 결국 내 이기적인 결정과 행동에 당신이 힘들어졌다는 걸 몰랐어. 대학 시절, 유학 시절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당신이었는데…. 그토록 노력 해서 겨우 결실을 맺은 당신의 직업적 커리어를 내가 육아라는 이름의 짐으로 짓눌러 버렸지. 그런데도 묵묵히 남편의 앞길을 응원하며 따라와 준 당
안녕하세요. 저는 상고심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미결수 수용자입니다. 교도소 담장 안에도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어 완연한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빠르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시간은 참 빨라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이곳에 머문지도 어느덧 1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딸아이가 있습니다. 일찍이 사랑했던 아내가 하늘의 별이 된 뒤, 홀로 키우며 지켜주고자 했던 딸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과 선택으로 인해 오히려 그 아이의 인생을 더 외롭고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아 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떠올리면 지금 이렇게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조차 미안하고 괴롭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지금의 저는 오로지 딸아이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반성 속에서 보내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 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변명의 여지는 없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딸 아이의 미래입니다. 올해 수능을 치르고 곧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될 아이의 앞날이 제 잘못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을지 두렵기만 합니다. 걱정과 미안함을 담아 여러 번 편지를 보냈습니다. 제
안녕하세요. 저는 6개월 동안 미결 독거실에서 지내며 외롭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더웠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추워졌습니다. 저처럼 힘든 감옥 생활 중에 반성과 후회의 나날을 보내고 계신 분들과 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글을 써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 어긋난 길로 빠져 잘못 살아왔습니다. 특가절도죄로 30년가량을 교도소에 갇혀 문제수로 살았던 젊은 날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들다가 결국 스스로에게 해선 안 될 행동까지 하고, 수용자 신분으로 응급 수술까지 받으며 교도관님들을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다 45세가 되자 갑자기 범죄라는 것이 무섭고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끝에 잠시나마 남들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행복했던 7년이 흘러 50대 초반이 된 제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강제추행죄로 입건되어 다시 징역을 살게 된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 의지로 도저히 성추행을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성추행을 반복하며 정신과 진료까지 받던 중에 또 성추행을 해서 지금은 전자장치 부착 명령까지 받았습니다. 제 나이 60세가 다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