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사람이 다니는 길, 차가 다니는 길처럼 길의 유형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그 삶 역시 하나의 길이다. 삶에 있어서 같은 길이라도 누군가에겐 오르막길이기도 하고, 내리막길이 되기도 한다. 어떨 때는 똑바른 길인 듯하다가도 구불구불 굽어진 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교도소 문을 통과하는 길도 그렇다. 같은 길이지만 입소할 때는 절망의 길이 되고 출소할 때는 희망의 길처럼 여겨진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교도소에 수용되는 길을 걷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 길을 꿈꾼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수용자들의 인생 역정을 곁에서 들여다보는 교도관의 길을 걷다 보면, 교도관은 어쩌면 성직자와 같은 사명감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인내와 절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수형자들 중에는 일반의 상식을 초월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차마 인간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사건도 생긴다. 특히나 가족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백지상태인 수형자들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어 곤란할 때도 있다. 하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멀쩡한 청년이 노역 10일 처분을 받고 들어와 입소 절차를 밟았다. 교도소 경험이 전혀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는데 벌금 100만 원에 노역을 한다는 것이 안타까워 부모님께 부탁을 해보라 했더니 염치가 없어 그냥 몸으로 때우겠다고 한다. 청년이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출소하는 날이 마침 근무 날이어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난방도 되고 TV도 나오고 지낼 만했지?”라고 묻자 “예 괜찮았어요”라고 대답하며 밝게 웃는다. 그는 10일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교도소를 떠났다. 노역유치집행은 벌금을 내지 않은 사람들을 벌금액에 대한 환산 일수만큼 노역장(교도소)에 유치시켜 노역(작업)을 시키는 제도다. 나는 이 노역유치집행이 대한민국 형 집행 중 가장 모순된 제도라고 생각한다. 노역수의 대부분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작업을 시킬 수 없고, 20대 청년과 같은 건강한 사람들이 들어오더라도 단기간의 교도소 생활 동안 마땅히 시킬 작업도 없기 때문이다. 징역에 이어 노역 집행을 받은 사람 중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 작업을 할 뿐이다. 노역을 1일이나 2일 집행 받는 사람들도 있다. 노역 1일은 당일에 출소시켜야 되는데 어떤
퇴직을 앞두고 지나온 교도관 생활을 되돌아보니,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있었지만 그래도 소명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만큼은 남아 있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 해소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업 팀장을 할 때 유독 인상적인 수용자가 있었다.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공장에 출역해 성실하게 일하고 모범적인 수용 생활을 하던 무기수 K다. 외국인이었던 그는 한국인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되자 청부살인을 저질렀고 그 대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온 후 23년간 단 한 번의 징벌도 없이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해 왔고 전임 작업 팀장도 K에 대한 칭찬과 함께 인수인계를 할 정도였다. 내가 작업팀장으로 있을 때도 K는 무척 성실하였고, 내가 자리를 운영지원팀장으로 옮기고 1년이 다 되어갈 때도 그는 여전히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79세가 된 K는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공장에 열심히 출역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K를 교도소에 그대로 두고 퇴직한다는 것은 교도관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무언의 압박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수용자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단 하
교도관들만큼 사고에 민감한 사람들도 있을까. 수용자들이 모두 잠든 때에도 교도관은 깨어 있다.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를 사건·사고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4부제로 바뀌었지만, 3부제로 근무할 때는 새벽 1시를 기점으로 선번, 후번으로 나누어 선번 근무자는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후번 근무자는 새벽 1시부터 오전 6시까지 각각 5시간씩 근무하였다.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주간 근무에 투입되었다. 그야말로 24시간을 대기하며 혹시라도 근무시간 중에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도관이다. 교도관들의 근무는 단순한 교대 근무가 아니라 책임과 긴장의 연속이자 24시간 대비 태세나 다름없다. 아무래도 교도소라는 근무 환경 자체가 타 직업보다 정신적, 신체적 체력을 많이 요구하는 편이고, 잠을 쫓고 야간 근무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 날 밤, 나는 침실에서 나와 교대를 위해 근무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길목엔 감시대가 있었고, 그곳에서 근무를 서던 경비 교도대가 수하를 하곤 했다. 그날도 감시대를 지나가는데, 경비 교도대 한 명이 “누구고?”라고 수하를 하였다. 피아식별을 위한 엄숙한 과정이었음에도 우리는 웃음을
교도관 생활을 하다 보면 모범적이고 성실한 수용자들의 모습에 뿌듯할 때도 많지만 수용자의 예측 불가한 행동으로 긴장해야 할 때도 있다. 수용자의 행동이 예측 불가한 만큼, 그때마다 교도관들의 상황판단도 민첩해야 더 큰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이른바 ‘니코틴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위해 미결 수용되어 있던 W의 사건은 <용감한 형사들>을 포함해 여러 방송에서 다룰 만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2017년 당시 21살이었던 W가 자신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던 19살이었던 여성과 혼인신고를 하고 일본 오사카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여행 첫날 아내가 사망하며 밝혀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W가 거액의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니코틴 원액을 여성의 혈관 내에 주사했고 여성이 급성 니코틴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W가 일기장에 써놓은 버킷리스트에는 00살까지 00억 만들기 등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하는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이 어린 여성의 생명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는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사건이었고 죄질이 아주 나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교도소에 들어온 후 W는 중독
2017년 8월 29일 자 뉴스에 이런 헤드라인의 기사가 실렸다. “네가 모셔라” 자식 다툼에 흉기 휘두른 90대 아버지.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90대의 노인이 자신의 부양 문제를 놓고 다투는 딸들을 보고 격분해 흉기를 휘둘렀다는 것이다. 경찰은 살인미수 혐의로 노인(당시 95세)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인은 미국 시민권자로, 큰딸 집에 모인 자식들 중 큰딸과 막내딸이 자신을 부양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이자 막내딸의 뺨을 때리고 허리춤에 숨겨 둔 흉기로 싸움을 말리는 막냇사위의 목과 옆구리를 찌르고 말았다. 다행히 막냇사위는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과 함께 미국에 살던 노인이 한국에 돌아오면서 부양 문제를 두고 딸들 간에 평소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노인이 막내딸 집에 머무는 동안 딸이 자신을 내보내려 한다고 생각해 막내딸과 사이가 좋지 않아졌고, “해코지를 당할까 봐 방어 차원에서 흉기를 지니고 있었다”라고 경찰에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인은 현장에 있던 가족 중 한 명의 신고로 현행범으로 체포,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결국 살인미수 혐의로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내가
오전 7시,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전을 받았다. 아침부터 미지정 사동에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미지정 사동을 담당할 때 데리고 있던 30대 후반의 J였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수용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던 J가 싸움을, 그것도 아버지뻘 되는 수용자 C와 싸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있었고 C가 J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한마디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말에 J가 C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J답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J가 아버지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가 보육원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C가 며칠 전에도 J에게 “너 보육원 출신이냐?”고 물어봐 기분이 나쁘던 차에 애비 없는 자식 소리까지 나오자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J의 이름을 부르며 “너 답지 않게 왜 그랬어?” 라고 물어보자 눈물을 왈칵 쏟는다. J가 사과를 하고 싶다 하고 C 역시 자식뻘 되는 놈 처벌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나는 팀장의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J에
대전교도소에서 야간 2팀 부당직 업무를 볼 때였다. 부당직은 새벽 2시에 당직을 교대해 아침 6시까지 소 전체를 책임지는 일을 한 다. 그날 새벽 5시쯤이었다. 60여 명이 3,200 여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취사장에서 약간 의 소란이 일어난 듯했다. 가석방 특혜 등의 인센티브를 주기도 할 정도로 한여름의 취 사장 출역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간간이 출역을 거부하는 수용자들도 있다. 그날은 수용자 A와 반장 사이에 일이 있는 듯했다. A가 작업거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반장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계속 출역을 거 부하고 혼자 조사실에 간다니 A를 조사수용 시키라며 남 일 이야기하듯 말했다. 나는 다 툼을 한 사람을 같이 보내야 하니 데리고 오 라고 했다. 그제야 반장은 머뭇거리며 두 사 람을 화해시키겠다고 했다. 수용자를 조사수용 시키는 일은 교도관 입장에서 시간 낭비도 줄이고 일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나는 그 방 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힘든 출 역을 한다는 건 가석방 출소를 기대한다는 것 일 텐데, 이번 일로 징벌을 받으면 그 혜 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A가 마음을 잡고 취사장 일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그로
D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몇 년 전, 외정문에서 접견을 기다리는 한 부부를 보게 되었다. “제발 사정 좀 봐주세요, 여기 신분증을 찍은 사진이라도 낼게요” “안됩니다. 돌아가세요.” 멀리 부산에서 아들을 보러 온 부부였는데, 하필 어머니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아 외정문 근무자에게 사정을 하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몇 번 접견을 온 적 있었고, 신분증을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근무자는 원칙을 내세울 뿐 요지부동이었다. 평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원칙대로 일하는 강성 근무자라 아무래도 어렵겠다 싶어 나 역시 지나가려는데, 부부가 내게 달려와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도저히 그 눈물을 외면할 수 없어 부부를 모시고 민원실로 향했다. “계장님! 이러시면 안 되죠! 민원실에서도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쩌려고 이러세요? ” 외정문 근무자는 밖으로 나와 내게 따지기 시작했다. 그의 격렬한 항의에 부부의 얼굴은 다시 잿빛으로 변했다. 나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한 뒤 부부를 민원실로 모시고 갔다. 알고 보니 신분증 없이는 안 된다고 했던 민원실의 대답은 아직 일이 미숙한 직원의 잘못된 안내였다. 역시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접견 잘하고 가시
“6사 응급환자 발생! 의료과로 이동 중!” 다급한 무전 소리에 나는 한달음에 의료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수용자 L이 피투성이가 된 발뒤꿈치를 붙잡고 누워있었다. 아킬레스건을 끊으려고 한 모양이다. 수용자 L은 교도소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그는 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했다. 젊을 땐 정보공개 청구와 인권위 진정으로 직원들과 부딪혔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해를 서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자 더 이상 그의 행동에 반응해 주는 이도 드물었다. 특히나 L이 수용되어 있는 교도소에 사형수와 무기수, 거물급 수용자들이 많아 그의 존재감은 점점 묻혀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벌인 소동도 관심을 끌어보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타교도소에 근무하는 교도관 친구가 내게 그의 과거사를 전달하며 신경 좀 써달라 부탁해왔다. 교도소에서 나이가 들어버린 L은 가족도 없고 건강도 나빠져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파손된 안경으로 인해 가까이하던 신문과 성경조차 읽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답답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수용자 L이 결국 선택한 건 자해였다. 그가 선택한 자해라는 방식은 오히려 모든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지만 앞으로도 긴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