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무심코 “안녕히 주무셨어요?”라는 인사를 건네곤 합니다. 사회에 있을 땐 그저 관습적인 예의라고만 생각했던 이 짧은 안부가, 이곳 담장 안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내다 보니 얼마나 고귀하고 어려운 축복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의 밤이 아무런 공포나 걱정 없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선의입니다. 하지만 우리 수용자들은 그 소중한 타인의 평온을 깨뜨리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잘못의 돌에 맞은 누군가는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안녕히’ 잠들지 못하는 고통의 밤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자각이 들 때면 감히 타인에게 안부를 묻거나 사랑을 논하는 것조차 오만하고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피해자의 상처를 외면한 채 내 마음의 평안만을 구하는 것은 또 다른 가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반성은 단순히 말로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뜨린 타인의 일상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방치하고 미워하며 불성실하게 수용 생활을 하는 것은 결코 속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온 것뿐인데 사람들은 참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사실 1년은 정확히 365일이 아니라 365일 6시간(5시간 48분)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 미세한 오차가 모여 4년에 한 번, 2월 29일이라는 '윤년'을 만들어냅니다. 어쩌면 제게 주어진 이 수용 생활 또한, 어긋난 삶의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선 '인생의 윤달' 같은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속되고 처음 맞이한 연말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텔레비전 속에서 한 해의 성과를 축하하며 환하게 웃는 이들을 보며, 공연히 그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저렇게 빛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차가운 담장 안에 덩그러니 멈춰 서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봅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 보려 해도 거울 속에 비친 건 일그러진 얼굴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닫습니다. 내가 시기했던 그들의 환한 미소는 정직하게 땀 흘린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는 것을요. 내가 그리워하는 가족의 온기,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새해 인사... 그 평범한 행복을 누릴 자격을 스스로 내던진 건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
안녕하세요. 교정시설 내에서 부정행위가 근절되고 모든 수용자들이 건강한 수용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현재 교정시설에서는 많은 수용자들이 정신과 진료를 통해 수면제 등을 비롯한 향정신성 의약품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약이 꼭 필요한 분들도 있지만,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고 일어나면 출소 날이겠다 싶을 정도로 아침, 점심, 저녁, 취침 전까지 수면제를 복용하며 수면제에 의존하는 중증 수용자가 많습니다. 일부에서는 약을 거래하기 위해 처방받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처방받은 약을 숨기려고 혀 밑이나 잇몸 속 깊숙이 넣거나, 약을 먹은 척하고 먹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약을 받고서 바닥에 흘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수용자들은 이렇게 숨긴 약들을 교정시설 내에서 수수·거래하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용되어 있는 중에도 이런 행위들로 벌금형부터 실형까지 선고된 경우를 보기도 했습니다. 한정된 인력의 교도관이 수용자들의 모든 행위를 감시하기도 어렵고, 다수 수용자들이 먹는 많은 양의 약을 하나하나 다 확인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제약을 악용해 이러한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일부 수용자들 때문에 실질적으
구치소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 제가 구치소에 수감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됐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 내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쯤에는 ‘실제로 일을 주도하고 지시했던 사람은 밖에 있는데 왜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하나’ 하는 억울함에 사로잡혀, 제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남 탓을 하기 바빴습니다. 지금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나의 탓이며,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던 일이 잘못된 일인 것을 알게 됐을 때 똑바로 생각해 보고 일을 그만둘 용기를 냈어야 했습니다. 제가 제 삶을 주도하지 못하고, 남이 시키는 대로, 제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며 살았던 결과 이곳까지 왔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제가 했던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지금은 사회로 돌아갔을 때 다시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만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처음 유치장에서 구치소로 이송되던 날은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며, 행여 나오는 호송 차량에 남편이 타고 있지 않을까 발을 동
제가 지내는 이곳 방에는 마흔 개의 하늘이 있습니다. 밖을 바라보는 창에 차가운 쇠창살이 드리워져 하늘이 마흔 개로 조각나 보이는 탓입니다. 넓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탓인지 생각도 점차 얕아져, 어머니의 가슴에 또 하나의 상처를 남겨 드렸네요. 어찌해야 할까요? 지금 제 눈가에 어른어른 맺힌 이 눈물이 어머니 가슴에 얼룩진 상처를 지울 수 있을까요? 매번 드리는 죄송하다는 말이 오늘도 역시 못난 아들의 인사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매번 어리석음에 취해 무엇인지 알면서도 아직까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저는, 언제쯤이면 어머니와 침묵 속에서도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누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을 넉넉히 나눌 수 있게 될까요? 제 나이가 벌써 40대 후반입니다. 그런데도 투정을 부리며 삶의 비포장길을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오늘 무슨 생각을 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셨나요? 감사 쓰기를 하면서 소장상을 안겨드리고 환히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머릿속에 감사를 채우려 분투하기 전에 모자란 인성을 채우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오늘 접견실을 나서며 깨달았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표현은 못 했지만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건축 설계를 하며 건물의 도면을 그리던 시절 제 인생의 설계도 역시 완벽하다고 믿었습니다. 남들보다 이른 승진과 단란한 가정, 모든 것이 순조로운 직진로였으니까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삶의 균열은 한순간에 찾아왔습니다. 가정의 붕괴와 이혼, 뒤이은 우울증은 제가 세워온 단단한 벽들을 모래성처럼 무너뜨렸습니다. 술로 현실을 피하려던 비겁함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이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 제 손에 쥐어진 것은 도면 대신 차가운 수갑이었습니다. 평생 사고 한번 치지 않고 살아온 저였기에 이곳 담장 안에서의 시간은 현실이 아닌 악몽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이건 정말 나다운 모습이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도망치고 싶었던 이 범죄자의 모습 또한 제 선택이 낳은 제 삶의 지독한 일부라는 사실을요. 피해자분들께 드린 상처와 제가 탕진한 이 시간은 결코 허송세월이나 운 나쁜 사고가 아닙니다. 제 인생의 기초 공사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뼈저리게 확인하는 가장 처절하고도 꼭 필요한 '재건축의 시간'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매일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의 화려
높고 푸른 하늘 쉼 없이 흘러가던 조각 구름 하나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보다 앞서가려 바람에 쫓기듯 몸을 맡겼네. 화려한 유혹 쫓다가 찬 바람에 흩어지고 말았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속도에만 취해 살았나 보다. 잠시 머물러 쉬어갈 생각은 못 한 채 그저 가볍게 흩어지기만 하다가 비바람에 찢기고 말았네. 모양새만 쫓다가 내 안의 무거움을 잊고 살았나 보다. 하지만, 이 바람이 멈춘 자리에서 나는 다시 배웠네. 구름을 만드는 건 가벼움이 아니라 견디는 힘이라는걸. 찢긴 몸뚱이 아픔 딛고 더 크고 무겁게 빗방울 가득 머금고 묵묵히 머무르는 시간. 화려했던 옛 모습 이제는 미련 없이 놓아주려 하네. 구름은 언제나 변하는 법이라 했나 영원한 건 없다지만 이곳에서 머금은 빗방울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언젠가 다시 흩어질 햇살 아래 메마른 땅 적시는 단비로. 모두들, 이 바람이 멈춘 곳에서 견디고 다시 흘러가길. 비를 품고 잠시 머무는 저 무거운 구름처럼 우리도 언젠가 세상을 향해 가벼운 조각 구름 되어 떠다닐 날을 기약하며. 오늘도 조용히 내 안의 무거움을 다독여 본다.
저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형을 산지 2년이 되어가는 수용자입니다. 올해 40세이고, 동갑내기 아내와의 사이에 6세 남자아이를 두었습니다. 현재 안양교도소 취사장에서 수용자들의 밥과 국을 만드는 ‘주걱조’에 속해있으며, 국과 찌개를 담당하는 기결 출역수입니다. 작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감정이 격앙된 채 쓴 아내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아내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인, 장모님과 함께 아동복 제조·판매업을 하고 있는데, 제가 이렇게 되면서 자기도 버텨보다 더는 장사를 유지하기 힘들어 개인회생 절차를 밟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들이 태어난 해부터 지금까지 계속 힘들게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장사를 하다가 폐업한 후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갔고, 아내는 집에서 육아를 하다가 다시 야시장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일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하니…. 한숨이 나왔습니다. ‘난 왜 사기 조직의 출금책을 한 걸까?’, ‘왜 내가 한 걸로도 모자라 지인에게 일을 소개시켜 주기까지 했을까?’ 엄마가 힘들면 아이의 세상은 무너진다는데, 이 편지를 받은 후 며칠간은 죄 지은 것에 대한 후회와 앞으로의 걱정에 빠져 자괴감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낙심
안녕하세요. 공장에서 매일 기계 소리와 함께 하루를 열고 있는 수용자입니다. 사회에 있을 때의 저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직하게 일해서 버는 돈의 가치를 우습게 여겼고, 어떻게든 남들보다 쉽고 빠르게 큰돈을 손에 쥐는 것만이 능력이라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편법을 바라는 마음이 커질수록 제 삶의 기초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갔고 결국 그 탐욕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이곳의 두꺼운 담장이었습니다. 공장 작업에 처음 투입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고되었습니다. 반복되는 공정 속에서 몸이 굳어가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정직하게 손을 움직인 만큼 생산품이 완성되어 나오고, 하루의 과업을 마친 뒤 느끼는 그 묵직한 피로감이 오히려 제 흐트러진 정신을 맑게 깨워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저는 얼마나 비겁하게 살아왔던 것일까요. 누군가는 뙤약볕 아래서, 혹은 공장의 열기 속에서 정직하게 땀 흘려 가정을 일구고 사회를 지탱해 왔을 텐데, 저는 그 당연한 '땀의 신성함'을 비웃으며 살아왔습니다. 이곳 공장에서 매일같이 반복하는 이 단순한 노동이, 실은 제 비뚤어진 가치관을 바로잡아주는
합천에서 생활하시는 건 어떤가요? 만족스러우신가요? 평소 도시를 떠나 공기 맑고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비로소 소원 성취를 하셨는지 3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여쭤보네요. 합천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상황들은 제외하고 순수 시골 생활만 놓고 보았을 때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구치소 안에서 시간 안 죽이고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등한시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파옵니다. 하지만 간혹 당신 스스로 전해주시는 소식들, 당화혈색소 수치가 감소했다거나 12인승 차량 운전도 능숙해졌다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합천에서 나름 잘 이겨내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얼마 전 신문에서 치매 예방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 두었는데 당장은 어머니의 치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머니의 모든 행동들이 못미더워 일일이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겨우 마음이 놓이곤 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알아서 잘 해내시는 분이라는 걸 요즘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는 못 미덥단 감정은 많이 내려놨는데, 대신 그 자리가 애틋함으로 채워진 것 같아요. 어머니의 2025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