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고객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고객은 내가 변호한 피고인의 어머니였는데, 그 피고인은 미성년자의제강간죄로 기소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영호(가명)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함께 한 동료 이민진 변호사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시간이 좋았기에 다음에 또 한번 만나기로 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 변호인과 고객이 사적으로 만나 좋은 시간을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영호의 어머니와 계속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는 것은 영호의 재판 결과가 기대했던 것만큼 좋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영호는 일부 무죄를 받았다. 나는 식사 자리에서 다시 한번 기대했던 결과를 내지 못해 송구하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진심으로 변론해 주신 것을 잘 안다며 격려해 주었다. 대신 우리는 잘못된 판결이 남긴 고통과 상처를 서로 위로했다. 어머니는 믿어주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경찰도, 검사도, 판사도 자신의 무고함을 믿어주지 않자 온 세상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듯한 고립감과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피고인들을 여럿 보았다. 사실 유죄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억울함을 제대로 알아줄 사람은 변호인뿐이다. 친구나 가족도 있겠지만 변호인만큼 사건의 내용과 그
법원이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도록 피고인이 판결선고가 임박한 시점에 공탁을 하는 소위 ‘기습 공탁’은 그동안 사법 정의를 어지럽히는 ‘법적 꼼수’로 지적됐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 감형을 노리려는 꼼수라는 것이다. 이를 막고자 지난 1월부터 형사소송법이 개정되었는데,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이 공탁금을 내면 법원이 판결 선고 전에 피해자 의견을 의무적으로 청취하는 규정이 신설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기습 공탁을 막으려다가 공탁 제도 전반에 대한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국민의 법 감정은 다른 것 같다. 그러나 법원과 구치소를 직접 발로 뛰며 접견과 변론을 하고 있는 변호인의 입장에서 깊숙한 실상을 들여다보면, 판결선고가 임박하여 늦게 공탁하는 것은 그런 뻔뻔한 계산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공탁이 선고 직전까지 밀리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계속 합의를 시도하다 금액이 맞지 않아 결국 선고가 임박해야 공탁으로 방향을 트는 경우가 있고, 둘째, 피고인이 공탁금을 마련하지 못하다가 뒤늦게서야 가족이나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돈을 마련하는 경우다. ‘기습’, ‘꼼수’ 등 언론에 회자 되는 수식어는 이런 뒷배경까지는 담지 못하는 것 같다. 공
후배들은 나를 온정주의 교도관이라고 불렀다. 단호하게 할 때는 칼같이 잘라내지만, 가능하면 앞뒤 상황을 살피고 대화를 먼저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범죄자가 된 경우도 보았고, 원칙만 고수하는 불합리한 구조와 행정으로 인생이 180도 바뀐 사람도 본 적 있다. 그러니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전후 사정을 보지 않고 단호하게만 대할 수는 없었다. 수용자 H는 초등학교 때 부모가 이혼하고 15살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와는 연락이 끊어져 할머니 밑에서 동생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고등학교 중퇴 후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여자 문제로 친구와 다투고 살인을 저질러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내가 담당하던 집중 근로 작업장은 일이 힘들긴 하지만 작업 장려금이 월 30만 원 이상으로 다른 작업장에 비해 많아 장기수들이 선호하는 곳이었다. 작업자를 담당인 내가 신입 수용자 중 직접 선발해 오기도 했는데, 초범이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H가 눈에 띄었다. 나는 교대 시간에 미지정 사동에 직접 가서 초범인 H를 면담하고 작업장으로 데려왔다. 어두운 구석이 있었지만, 자존심 강하고
사건을 해결할 어떤 단서도 없어 미궁에 빠졌을 때 때론 한 통의 전화가 탈출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2010년, 경기 고양경찰서 강력5팀 팀장이었던 형사 J는 고양시 일대를 충격에 빠뜨린 한 살인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하지만 범인은커녕 변사자의 신원을 특정하지도 못해 수사는 난항에 빠져 있었다. 그때 형사 J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사건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사건의 시작은 2010년 2월 3일, 경기 고양시의 한 공원이었다. 아직 봄기운도 돌지 않았던 늦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어디선가 참을 수 없는 악취가 공원 주변을 맴돌았다. 공원은 아파트 단지와 멀지 않은 곳이었고 근처 교회의 교인들도 자주 나와 보는 곳이었다. 그날도 교인들은 공원에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더욱 심해진 냄새가 교인들의 코를 찔렀다. 무언가 썩어가는 지독한 냄새였다. 결국 사람들은 악취의 근원을 찾아 공원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누군가 무심코 시선을 내렸던 어느 순간, 수북이 쌓인 낙엽 아래서 하얀 무언가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손이었다. 신고를 받은 고양경찰서 강력5팀이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팀장이었던 형사 J는 평소에도 그 공원을
1990년대 초 전국 교정기관에는 집시법 위반 등으로 수용된 대학생 공안 사범들이 많았다. 그들은 독거실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6사동 중층과 상층 독거실 1, 2, 3방이 그들의 수용거실이었다. 90년대 중반부터는 혼거수용할 수 없는 소년 수용자들이 그 방에 독거수용되었고, 2010년 천안교도소가 외국인 및 한국인 성인교도소로 기능 전환되며 BBK 사건으로 유명한 미국 국적의 김경준이 6사 중층 독서실에 수용되었다. BBK 사건은 당시 대통령이던 MB와 관련된 사건이라 김경준과 관련된 일은 상급 기관인 교정본부나 법무부에서 상당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기자들이 친지를 가장해 김경준과 접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원실에서 기자의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김경준과 접견을 허용하였고 이 사실이 알려지며 대전청에서 우리 소 관련 직원들을 밤 11시가 넘도록 조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당시 소장님이 좋은 분이라 직원들을 질책하는 대신 다독이고 격려했지만, 관련 직원들에 대한 문책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이 있고부터 몇 달 지난 어느 날, 총무과 사무실 밖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70대의 노
<더시사법률>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 구독자들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경우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신문을 통해 소통했던 독자들과 직접 만나게 되고 각자의 사연을 듣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은 내게도 큰 의미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렇게 맺어진 인연 가운데 하나로 사건을 맡게 되었고 첫 판결이 있었다. 항소심 결과는 집행유예. 병역법 위반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의뢰인은 그렇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처음 의뢰인을 접견실에서 만났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의뢰인은 짧은 답변만을 반복하며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양형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접견이 끝난 후,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아버지의 간절한 전화가 걸려 왔다. 가족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렇게 나는 그의 항소심 사건을 맡게 되었다. 판결 선고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의뢰인과의 접견을 이어갔다. 약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다섯 번이 넘는 접견을 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침묵만 흐르던 접견실이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려 했다. 어떤 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