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필리핀 중부의 휴양지이자 무법지대로 불리는 앙헬레스. 이곳의 코리안데스크로 파견된 L 경감은 이 도시의 복판에서 벌어진 60대 한인 부동산업자 A 씨의 피살사건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초임 시절 형사팀에서 근무한 적은 있지만 그는 수사부서의 전문 경찰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 앙헬레스에 있는 이상 뛰어난 형사가 되어야만 했다. L 경감이 확보한 단서는 단 하나,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킬러의 몽타주였다. 킬러의 도주 경로도, 살해 지시자의 흔적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결국 L 경감은 과거 90년대의 형사들처럼 ‘발품’을 팔아 수사에 나섰다. L 경감은 A 씨의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며 원한을 품을 만한 인물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교민사회 내에서 A 씨의 주변엔 ‘사방이 적’이었다. A 씨가 소유한 한인 대상의 호텔이 문제였다. 해당 호텔은 투자자를 모집해 수익금을 배분하는 구조였는데 A 씨의 사망 이후 호텔 경영권 분쟁까지 벌어진 상황이었다. 모두가 적이니 용의자 특정은 어려웠고, 코리안데스크로 온 L 경감이 혼자서 CCTV를 추적하거나 통신수사를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현지
형사 사건에서 중요한 양형 자료 중 하나가 바로 ‘탄원서’다. 많은 의뢰인 가족들이 이 탄원서를 준비하기 위해 주변 지인들에게 서명 등을 부탁하지만, 정작 어떤 내용으로 써야 효과적인지 몰라 막막해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얼마 전에도 의뢰인 어머니와 상담을 하던 중 “탄원서를 부탁해야 하는데 어떻게 써달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셨던 기억이 있다. 흔히 탄원서라고 하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법정에서 양형에 효과를 보려면 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탄원서를 읽는 판사가 피고인을 선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피고인의 성품을 언급해야 한다면 단순히 “착한 사람”이나 “성실한 사람”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쓰기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야 한다. “평소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고, 주변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면 항상 먼저 나서서 돕던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가족들이 처한 어려운 사정을 강조하고 싶다면, 이 역시 구체적이고 명확한 서술이 필요하다. 피고인의 수입이 가족의 생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거나, 구금으
‘미결구금일수’라는 것은 판결이 선고되기 전날까지 구속되어 있는 기간을 뜻한다. 미결구금은 피고인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결국 자유형과 유사하기 때문에 형법 제57조가 인권보호의 관점에서 미결구금일수의 전부를 본형에 산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의뢰인들께 이 미결구금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재판 결과가 참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씀드린다. 피해자가 한 명인 단순 인정 사건에서 합의가 완료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형사 재판에서 이 속칭 ‘밑동’이라고 불리는 미결구금 기간을 최대한 길게 가지고 가는 것이 최종적으로 보다 좋은 결과를 받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형사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극도의 스트레스, 불안감을 동반하는 일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언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계속 놓여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재판받는 사람의 인생이 바뀌게 되는 형사 재판 제도의 본질적인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특히나 구속 상태에서 진행이 되면 몸과 마음이 고되고 불안감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 상태에서 처음 재판을 받는 많은 분들은 이 미결구금 기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어 한다. 빨리 재판을 끝내고 싶
‘친족간 강제추행’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직접적인 혈연관계 또는 사실상 친족과 다름없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범죄는 그 특성상 피해자가 받는 충격이 상당하고, 가해자에 대한 법원의 시선 역시 매우 엄정하다. 그러다 보니 1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되고 피해자와 합의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항소심에서 감형이나 집행유예를 노리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현실적인 방어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다. 1심에서 실형을 받았을 때 항소심에서 감형을 받을 수 있는 주요 포인트는 무엇일까? 1. 사실관계 재검토 : 무죄 또는 죄명 축소 가능성 항소심은 1심만큼 폭넓게 사실관계를 재심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특정한 요건이 충족되거나 1심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주요 증거가 새롭게 제출된다면, 사인이나 법리오해를 주장할 여지는 남아 있어, 항소심에서 반드시 증거 채택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항소심에서라도 피해 진술의 모순점을 찾거나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황을 입증할 수 있다면 무죄 혹은 범죄사실 축소를 기대할 수 있다. 2. 양형부당 주장 : 왜 ‘이 정도 형량’이면 충분한가? 1심에서 사실관계와 법정 적용이 인정된 이후에는, 2심에서는 주로 양
과거의 교도소는 단순히 격리와 구금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사회 안전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치료정책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위험성을 제거함으로써 사회 안전에 힘쓰고 있다. 안전한 사회를 구현한다는 목표에 다가가는 방식이 격리로 할 것인지, 아니면 위험성을 제거하는 치료로 할 것인지는 접근방법이 정반대다. 치료정책의 시작은 1961년 명칭 변경부터 시작되었다. 과거에 교도소는 형무소로, 교도관을 형무관으로 불렀는데, 형무소의 ‘형무’는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을 말하지만 교도소의 ‘교도’는 바로잡아 이끄는 것을 뜻한다.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밀어내야 할 짐이 아니라 범죄성을 치료해 선량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려는 치료정책이 힘을 얻고 있다. 법무부의 치료정책은 2006년 중독성범죄자 교화정책부터 시작되었다. 법제화가 이뤄지지 않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가 2010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19세 미만의 미성년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면 300시간의 범위에서 치료과정 이수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치료과정 참여를 강제하고 이를 어길 시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신설한 것이다
몇 년 전 D 교도소에서 야간 사동 팀장을 할 때였다. 수용 사동 담당 직원 K가 수용자 한 명을 조사 수용해달라며 사무실로 데려왔다. 수용자들이 외부에 발송하는 편지에 찍힌 소인을 지우고 떼어낸 우표를 붙였다는 이유였다. 수용자 S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무릎 꿇고 울며 사정했지만, 담당 직원 K는 처벌 의사를 강력하게 표했다. 나는 사안이 크지 않고 수용자가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만큼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직원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우선 조사 수용을 시키고 다음 날 조사실에 연락해 훈계 처분을 해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정작 조사실에서는 우표 소인을 지운 행위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라며 S에게 징벌을 부과했다. 수용 질서를 바로잡고 수용자들을 교정 교화하는 데는 교도관 각자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소년교도소에 근무할 당시, 교도소 직원들과 소년 수용자들은 대체로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 선생님과 학생과 같이 서로에게 끈끈한 정이 있었고 적대관계가 아닌 보살펴주고, 도와주는 그런 관계였다. 소년 수용자들이 관규 위반을 했을 때도 큰 문제가 아니면 직원들은 조사 수용시키기보
L 경감은 경찰이 된 이후 거침없는 승진 가도를 달려온 엘리트였다. 2015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경감으로 승진한 후 주변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의 마음은 공허하였다. 그의 대학 동기들은 국정원에서 근무하거나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가끔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L 경감은 늘 도전과 모험을 꿈꿨다. 경찰이 된 후엔 승진과 성과가 최대의 모험이라 생각했지만 너무 이른 성공은 오히려 그의 갈증을 키웠다. 더 크고, 낯선 세계로의 도전이 필요해졌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 나선 L 경감은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학문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눈길을 끄는 공고 하나를 발견했다.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공고였다. 코리안데스크는 필리핀 현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벌어지는 강력범죄를 전담해 필리핀 경찰과 공조수사를 펼치는 곳이었다. 2000년대 들어 필리핀에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급증했고, 이에 2010년부터는 마닐라에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하고 경감급 베테랑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직접 사건 수사에 뛰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L 경감이 본 공고는 마닐라 쪽이 아닌
4. 1. 만우절 아침에 일어나서 휴대폰을 보니 장제원 전 국회의원의 사망 소식이 곳곳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전날 밤 11시 반경 서울 강동구 오피스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장 의원은 10년 전 부친이 이사장이던 부산 모 대학 부총장 시절 여비서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장제원 의원은 내가 일면식도 없고 특별히 호감을 가졌던 정치인도 아니다. 그런데도 만우절 오전 내내 유쾌하지 않은 거짓말에 속기라도 한 것처럼 우울해졌다. 피해자도 걱정된다. 성폭력으로 인해 10년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이제 어렵게 용기를 내서 법적, 사회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제 장 의원의 자살로 더 큰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을 지도 모른다. 부디 불필요한 죄책감과 못난 사람들의 입길에 마음을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법복을 벗고 작년부터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보니 이제는 변호사의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변호사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하는 것도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내가 장 의원의 변호인이었다면 어떤 조력을 했어야 했을까. 변호사인 내 입장에서는 의뢰인이 억울하다고 말할수록 힘이 난다. 일을 하면서 의뢰인이 진짜 억울하다는 것을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