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 3일 오후 3시 10분경 대구 남구 대명11동 ‘장미 비디오’에서 당시 30대였던 여주인은 여섯 살 막내아들에게 짜장라면을 끓여주던 평범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성에게 여주인은 13차례나 흉기에 찔린 채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시간 만에 숨졌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피해자의 여섯 살 아들이었다. 아이는 울면서 인근 가게로 달려가 “강도가 우리 엄마를 찔렀다”고 외쳤다.
물증 없는 살인사건…경찰 “범인 자백 받아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유일한 목격자인 아이가 기억해낸 범인의 모습은 “20대쯤 되는 남성”이라는 단서뿐이었다. 범인의 지문·DNA·흉기 등 현장에서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사건 발생 이틀 뒤인 1월 5일, 장미 비디오 근처에서 불심검문을 받던 만 20세 청년 이민형 씨가 체포됐다. 그는 군에서 52일째 복귀하지 않은 탈영병이었다. 경찰은 그가 탈영 후 대구 등지에서 여러 건의 강도와 절도 행각을 벌였으며, 장미 비디오 가게의 여주인도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선 이민형은 “누군가 알 거예요. 누군가는 알 거라고요”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는 자신의 모든 범행을 순순히 자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범행 시간대에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옷차림을 기억하는 이웃 주민, 현장 인근 다방에서 이민형을 본 것 같다고 진술한 여종업원의 목격담이 더해졌다. 군사법원 1심은 DNA, 흉기와 같은 결정적인 물적 증거 없이 자백과 목격자 진술만으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나는 진범이 아니다”…27년 만의 진술 번복과 강압 수사 의혹
2025년, 48세가 된 이민형 씨는 옥중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에게 편지를 보냈고, 내용은 지난 7월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그는 “나는 여주인을 살해하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겁쟁이였다. 잘못한 게 있으면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고쳐나가야 되는데 겁이 나서 못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또 “수십 시간 잠을 못 자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고, 범인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었던 것은 수사관들이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민형은 제작진에게 “당시 형사들의 가혹행위가 있었다. 성추행도 서슴지 않는 고문을 당했다”고 전했다.
방송에서 형사들은 그의 나체 사진을 기록으로 남기며 가혹 행위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는 “여러 가혹행위 중에 옷을 벗게끔 해서 사진 촬영을 했다는 것은 재심사유인 경찰의 직무상 범죄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취재 과정에서 한 수사관은 “이민형도 나에게 몇 번 맞았다”며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배치되는 목격자 증언과 알리바이…혈흔 반응도 미검출
‘그것이 알고싶다’ 측은 세 명의 목격자 진술에도 모순이 있다며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피해자 아들의 법정 증언은 이민형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핵심 근거 가운데 하나였지만, 전문가들은 진술의 신뢰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방송에 출연한 한 상담심리학 교수는 피해자 아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마치 TV를 시청하듯 누군가를 봤다”고 진술한 점을 두고 이례적이라고 평가하며, 주변 어른들의 재촉이 아이의 기억과 진술을 왜곡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또 아이는 범인이 가방을 챙겨 달아났다고 주장했지만, 범인을 봤다고 진술했던 한 이웃은 “빈손으로 태연히 걸어갔다”고 증언해 당시 상황을 둘러싼 진술이 서로 맞지 않는 정황도 드러났다.
이씨는 항소심 단계에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며 알리바이를 주장했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범행 시간대에 범행 현장에서 약 6km 거리의 한 만화방과 여인숙에 있었다고 항변했다. 현재 지도로 확인해본 결과 대중교통으로 40분,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이씨가 갔다고 주장한 만화방 장부에는 이씨의 대여 기록이 작성돼 있었다. 당시 만화방은 교대 근무를 했는데 12시 이후에 근무했던 만화방 주인은 “이 글씨는 내 글씨가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묘사한 흉기가 피해자 아들이 진술한 것과 일치한다”며 알리바이보다 자백의 신빙성을 높게 평가해 유죄로 판결했다.
방송은 흉기의 신빙성 자체에도 의문을 표했다. 이민형이 자백에서 묘사한 흉기는 병원에서 절도한 접이식 칼이었는데, 해당 의사는 칼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한 법의학교실 교수는 피해자 상처를 감정한 결과 “접이식 칼은 흉기로 쓰였을 가능성이 낮다”며 “10cm 칼로 11cm 깊이의 상처를 내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분석했다.
또 ‘그것이 알고싶다’ 측은 당시 이씨의 손톱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던 점을 확인하기 위해, 이씨의 진술에 따라 당시 국과수가 했던 방법과 유사하게 69시간 뒤 혈흔 검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LMG 시약에서는 극미량이 검출됐고, 루미놀 시약에서는 참가자 모두에게서 혈흔이 확인돼, 당시 수사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더라도 곧바로 ‘범행 부재’ 혹은 ‘범행 존재’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실험 결과가 나왔다.
이씨는 최근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옥중에서 써 내려간 편지에서 “저로 인해 다시 그날 일들을 떠올려야 하는 그분들의 마음과 고통이 어떨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진범을 잡아 단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