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통에서 발견된 여고생 사체… 잘나가던 ‘백화양조’ 어떻게 망했나

소주 생산하며 사세 확장
술통에서 발견된 女 시신
계열사 사장 아들의 만행
거짓말탐지기로 최초 기소

 

 

1945년, 전북 군산에 한 주류회사가 설립되었다. 회사의 이름은 ‘백화양조’. 이 업체는 청주, 인삼주 등을 생산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소주 공장을 신설하며 사세가 점점 커진 백화양조는 1970년대에 이르러 계열사도 여럿 거느리게 되는 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때는 1978년 5월, ‘백화양조’가 한참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다. 그날도 보통날과 다름없이 공장 직원이 출근했고, 양조장을 둘러보던 중 직원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술통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여고생의 사체였다. 군산 소재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B 양(당시 18세)이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백화양조는 물론 지역이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사체가 발견되기 한 달 전인 1978년 4월 8일, 백화양조 계열사 사장의 아들이었던 A 군은 4시 30분쯤 오전 일찍 과외를 받으러 가는 B 양을 불러 세웠다.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던 B 양은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어 주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A 군은 군산 지역 재력가의 아들로 알려지며 또래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둘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갑내기로 서로 교제하던 사이였다. 그 무렵 A 군은 한 친구로부터 ‘B 양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식의 얘기를 전달받고 B 양을 의심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고, 급기야 새벽같이 공부하러 나가는 B 양을 불러 세운 것이다.


A 군은 B 양을 자신의 아버지가 계열사 사장으로 있는 백화양조 공장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경비원이 없는 틈을 타 2층 실험실로 함께 이동했다. 이날 실험실에서 A 군은 B 양의 남자관계를 따져 묻기 시작했다.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했느냐는 A 군의 물음에 B 양은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A 군이 의심을 거두지 않자 B 양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옷을 모두 벗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A 군은 B 양을 더욱 몰아세우며 추궁하였고, 이에 모욕감과 수치심, 공포를 느낀 B 양은 결국 경련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당황한 A 군이 B 양의 어깨를 몇 번 흔들어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시간은 흘러 곧 공장 문이 열릴 시간이었다. A 군은 B 양이 깨어나지 않자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B 양을 술통에 넣어버렸다. B 양은 단지 의식만 잃었을 뿐, 사망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결과적으로 A 군에 의해 익사를 당하고 말았다.


B 양의 사체가 발견되고 경찰은 용의자를 20여 명으로 압축해 수사에 나섰다. 그리고 A 군이 사건 발생 하루 전 B 양의 집에 전화해 만나기로 약속했던 정황 등을 포착했고, A 군을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하지만 A 군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이 사건은 한 시절을 풍미하던 ‘백화양조’가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으로 유명하지만, 국내 거짓말탐지 수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A 군이 계속해서 범행을 부인하자 검찰은 범행의 자백을 받기 위해 거짓말탐지기를 도입했고, A 군으로부터 거짓 반응을 얻어내 그를 기소한 것이다. 이 사건은 거짓말탐지기로 거짓 반응을 얻어 피의자를 기소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78년 10월 14일, 재판부는 선고공판에서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를 보강증거로 인정하며 피고인 A 군에게 징역 장기 3년, 단기 2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의 정확성을 담보할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증거들에 의해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 원심형량을 확정했다. 이후 A 군은 1981년 만기출소 하였고 이후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사건이 발생하고 당시 한 잡지사의 심층 보도로 백화양조가 시체가 들어간 소주를 판매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백화양조는 해당 잡지를 전량 구매해 소각하는 등 소문을 막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화양조는 1985년 경영권이 두산그룹에 넘어갔다가 2009년 롯데주류에 매각되며 기업의 명맥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