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서울구치소에서 가석방을 앞둔 수형자 A씨는 분류심사 과정에서 뜻밖의 일을 겪었다. 형기의 상당 부분을 채운 그는 담당 교도관으로부터 다음 달 가석방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위력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만다. A씨는 분류심사실에서 담당 교도관 이모씨와 단둘이 마주했다. 2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진행된 상담 도중 이씨는 가석방 가능성을 언급하며 기대를 키웠다. 하지만 대화는 점점 A씨의 사적인 영역으로 흘러갔다. 교도관은 “남편과 왜 별거 중이냐”, “이렇게 예쁜데 남편이 왜 바람을 피우느냐”는 등의 질문을 던졌고 분류과에서 작성하는 서류가 중요하며 잘 협조하면 가석방이 빨라질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덧붙였다. 이어 이씨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한 뒤 A씨에게 다가가 신체를 접촉했다. A씨가 저항했으나 완력으로 제압하고 추행을 이어갔다. A씨가 소리를 지르겠다고 하고 나서야 이씨는 행위를 멈췄다. 이씨는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아야 가석방이 가능하다며 입단속을 요구했다. A씨는 곧 여성 교도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상부 보고가 이뤄졌고 이씨는 피해자 앞에서 사과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A씨
2009년 3월 25일 오전 경남 창원 명서동의 한 주택가 골목에 세워진 택시 안에서 50대 기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는 당시 58세였던 강선길 씨였다. 그는 차량 뒷좌석에 쓰러져 있었고 목 부위가 공업용 커터칼로 깊게 절단된 상태였다. 경찰은 차량 내부와 주변을 정밀 수색했지만 용의자를 특정할 뚜렷한 지문이나 DNA를 확보하지 못했다. 인근 CCTV 수백 곳을 확인했으나 택시의 정확한 이동 경로는 특정되지 않았다. 수사팀이 주목한 단서는 운행 기록이 남아 있던 타코미터였다. 분석 결과 범인은 3월 24일 밤 9시 50분쯤 시내에서 강씨의 택시에 올라 시외 지역으로 가자고 한 뒤 약 30분 후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됐다. 그해 7월 인근 지역에서 또 다른 택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 시간 흉기로 기사를 위협해 트렁크에 가둔 뒤 현금을 빼앗은 3인조가 검거됐다. 이들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외국인들로, 경찰은 이들 가운데 19세였던 보조로브 아크말을 창원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아크말은 7월 강도 사건은 인정했지만 3월 살인 사건은 부인했다. 그러나 두 차례 조사 뒤 자백이 나왔다. 그는 명곡교 인근에서 택시에 오른 뒤
1988년 가을 경기도 화성의 한 주택에서 벌어진 초등학생 살인 사건은 30여 년이 지난 뒤 대한민국 형사사법 시스템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사건이 됐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가운데 하나로 분류됐던 ‘화성 8차 사건’은 진범 이춘재의 자백과 재수사를 거치며 소아마비 장애 청년에게 씌워졌던 살인 누명을 벗겨냈다. 그리고 재심 재판을 통해 법원이 스스로의 오판과 국가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1988년 9월 15일 화성 태안읍의 한 가정집에서 자던 13세 박양이 목 압박 흔적과 성폭행 정황이 있는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됐다. 방문 문고리 주변 창호지는 찢겨 있었고 경찰은 “범인이 담을 넘어 침입해 창호지를 찢고 문고리를 따 방으로 들어온 뒤 성폭행과 살해를 저지른 후 이불을 덮어놓고 도주했다”고 결론 내렸다. 현장 침구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음모가 채취됐다. 경찰은 이 체모를 일본에 보내 성분 분석을 의뢰했고 일반인보다 300배 이상 많은 티타늄이 검출됐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다. 수사팀은 이를 근거로 수리공과 용접공 등 금속·기계류 종사자를 중심으로 수사를 좁혔고 당시 경운기 수리센터에서 일하던 22세 청년 윤성여씨를 용의자로 특정했다. 윤 씨
1975년 1월 2일, 새해 벽두. 서울 한복판 명동 사보이호텔에 건장한 사내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모여들었다. 2세대 폭력조직의 대표 격이자 서울 최대 조직으로 불리던 신상사파의 신년 모임이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출신 ‘신상사’ 신상현이 이끄는 조직은 당시 명동 일대를 사실상 장악하며 ‘건드릴 수 없는 절대 권력’으로 통했다. 그때만 해도 주먹 세계 안팎에선 “칼을 쓰지 않는 맨주먹의 낭만 시대”라는 미화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사보이호텔에서 벌어진 피습 사건은 그런 환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회칼과 방망이, 쇠파이프가 난무한 그날 이후, 한국 조폭 세계의 폭력 양상과 권력 지형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 서울 주먹판의 한 축은 명동을 근거지로 한 신상사파였다. 평양 ‘박치기’의 상징 같은 이화룡을 중심으로 세를 키운 이 조직은 명동·을지로 일대 유흥가에서 기름·얼음·술·안주 공급을 사실상 독점하며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이에 맞선 또 다른 축은 광주·전주·목포·여수 등 호남 출신 건달들이 연합한 범호남파였다. 조창조→정학고→오종철→조양은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심으로 무교동·종로·퇴계로 유흥가에 뿌리를 내린 범호남파는 점차 명동의
1998년 1월 3일 오후 3시 10분경, 대구 남구 대명11동의 한 비디오 대여점인 ‘장미 비디오’의 30대 여주인은 여섯 살 된 막내아들에게 짜장라면을 끓여주고 있었다. 평범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던 모자는 곧 들이닥칠 불행에 대해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잠시 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성은 흉기를 휘둘렀고, 여주인은 13차례나 찔린 채 쓰러졌다. 이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3시간 만에 숨졌다. 현장을 목격한 이는 어린 아들뿐이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인근 상점으로 달려가 “강도가 우리 엄마를 찔렀다”라고 외쳤다. 물증 없는 살인사건…경찰 “범인 자백 받아냈다” 수사는 곧바로 시작됐지만, 사건 현장에서는 지문이나 DNA, 흉기 등 결정적 물증이 확보되지 않았다. 유일한 단서는 아이가 떠올린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라는 인상착의뿐이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이틀 뒤, 사건 현장 인근에서 불심검문을 받던 20세 청년 이민형씨가 체포했다. 그는 군 복무 중 탈영 상태였고, 경찰은 그가 탈영 후 대구 등지에서 여러 건의 강도·절도를 저질렀으며, 장미 비디오 가게 살인 역시 그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자신을 촬영하러 온 수많은 카메라 앞에 공개적으
조선족 선원, 그리고 첫 항해의 시작 약 30년 전 1996년 8월 2일 새벽, 남태평양 사모아 인근을 항해 중이던 254톤급 온두라스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에서 한국 해운 역사상 최악의 선상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족 선원 6명이 일으킨 반란으로 총 11명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사건이였다. 1996년 6월 7일, 최씨를 선장으로 한 원양어선 ‘페스카마호’가 부산 남항을 출항했다. 선장을 포함해 한국인 7명과 인도네시아인 선원 10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페스카마호는 부산항을 출발해 8일간 항해한 끝에 괌 인근 ‘타니안 섬’에 도착했다. 이번 경유는 부산항에서 미처 조달하지 못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목적과 함께, 목표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 추가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한국인 수뇌부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선원을 찾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선장은 출항 전부터 이미 회사 측에 인력 보강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해왔고 조선족 선원 7명이 새로 승선했다. 폭행을 멈춰달라…멈추지 않은 폭력의 일상 페스카마호의 선장 최씨에게 이번 항해는 선장으로서의 첫 출항이었다. 승선한 선원들 상당수는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들이었고 최 선장 역시 숙련된 지휘 경
2022년 5월 22일 오전 5시 부산 서면의 한 오피스텔 공동현관 앞, 20대 여성 김모씨는 귀가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뒤따라 들어온 이모(당시 30세)씨가 갑자기 발길질로 김씨의 머리 뒤쪽을 가격했다. 이른바 ‘돌려차기’였다. 피해자는 벽면에 부딪힌 뒤 바닥에 쓰러졌다. 가해자는 쓰러진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먼저 빼앗았다. 이후 머리 부위를 향해 발길질을 이어갔다. 첫 공격이 이뤄진 뒤 피해자가 의식을 잃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불과 수 초 사이에 상황이 급변했다. 이씨는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어깨에 둘러멘 채 CCTV가 닿지 않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약 7분 뒤 그는 피해자를 1층 복도에 내려둔 채 현장을 떠났다. 피해자는 입주민에 의해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고 외상성 두개 내 출혈 등 중대한 뇌손상 진단을 받았다. 발목 부위 역시 후유장애 가능성이 제기됐다. 수사에 나선 부산경찰청은 주변 CCTV를 토대로 동선을 추적해 사흘 만에 부산 시내 한 숙박업소에서 이씨를 검거했다. 두 사람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로 확인됐다. 이씨는 체포 직후 피해자가 자신을 노려본 것 같아 기분이 상해 범행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
2018년 10월 31일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가해자의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청원 글이 올라왔다. 사랑하는 딸이 결혼을 약속한 남자에게 살해되었다는 유족의 사연이었다. 유족은 잔인하고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엄벌에 처해달라고 호소했다. 피해자는 23세의 A씨, 가해자는 A씨와 교제 중이던 28세의 남성 B씨였다. A씨는 2014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소재의 K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해 학교 근처의 스피치 어학원에 등록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B씨도 해당 어학원에 다녔다. B씨는 A씨에게 자신을 K대학 동문이라 소개하고 친밀감을 보이며 A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받았지만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 후 4년이 흘러 A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의 한 대기업에 취업했다. 2018년 7월 어느 날, A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B씨였다.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회에서 인턴을 마친 뒤 춘천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짝사랑해 왔는데 준비가 되지 않아 말하지 못했고, 이제는 결혼 준비가 다 되어 연락을 했다”라고 고백했다.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었다. B씨는 A씨
“집에 와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죽어 있어요.” 2022년 10월 25일 밤 11시 30분경 한 남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왔다. 남자의 신고로 구급대원과 경찰이 경기도 광명시의 한 아파트로 출동했다. 집 안에는 40대 여성 B씨와 중학생 C군(당시 15세), 초등학생 D군(당시 10세)이 피를 흘린 채 죽어있었다. 신고자인 남자는 이 집의 가장 A씨였다. 평범한 가정의 모자가 집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범인의 실체였다. 이튿날 경찰은 광명 일가족 살해사건의 범인을 긴급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바로 A씨였다. A씨가 밝힌 범행 동기는 황당했다. “8년 전부터 기억을 잃었다가 최근 되찾았다”, “나를 기계처럼 일만 시켜 화가 치밀어 그랬다”, “나는 3개의 인격을 갖고 있고 매일 바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총 15시간 분량의 음성이 담긴 휴대전화에는 A씨의 잔혹한 범행과 그날의 진실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당시 A씨는 특별한 직업 없이 1년 반을 지내오고 있었다. 그를 대신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아내 B씨였고,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자 부부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이제 막 사춘기에
1999년 11월 5일 새벽, 제주 북초등학교 인근에 세워진 차량에서 한 남성이 피살된 채 발견됐다. 변호사 이승용씨였다. 그는 서울지검, 부산지검 등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 1992년 고향인 제주로 내려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 7년 만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 변호사의 시신에는 심장을 관통할 정도로 예리한 흉기가 사용된 흔적이 있었다. 당시 경찰은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용의자 특정에 나섰지만, 범인은 물론,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파악하지 못했다. 1년 뒤 수사본부마저 해체되었고 이 변호사 살인 사건은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된다. 지난 2021년,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22년 만에 이승용 변호사 살인 사건 피의자가 경찰에 체포됐다.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건 한 방송이었다. 앞선 2016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 변호사 살인사건을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으로 보고 제보를 받기 시작했지만 결정적 제보가 없어 취재를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던 중 2019년, 캄보디아에서 체류 중이던 김모씨가 해당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며 직접 연락해 온 것이었다. 제작진을 만난 김씨는 본인이 제주 폭력 조직 유탁파 행동대원이었다고 소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