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사건을 맡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속도’다. 사건은 빠르게 굳어지고, 한번 굳어진 인상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객관적 물증이 부족한 경우에는 진술이 전부인 경우가 많고, 그 진술이 곧 사건의 프레임이 된다. 그 프레임이 사실관계의 촘촘한 확인보다 ‘분위기’와 ‘감정’쪽으로 먼저 달려갈때 문제가 생긴다. 변호사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무조건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이 사실과 정합적인지, 법이 요구하는 요건을 충족하는지, ‘증명’의 기준에 따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번 사건도 출발할 당시에는 당사자 간 진술이 엇갈리는 ‘진술 대 진술’ 상황이었다. 의뢰인은 캠프에서 알게 된 여성과 술 을 마신 뒤, 피해자가 만취해 항거불능 상태에 이르렀음을 이용해 간음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 공소사실의 요지는 이렇다. 의뢰인이 피해자를 방으로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침대에 눕히고 성적 행위를 시도했으며, 잠에서 깬 피해자가 이를 거부해 준강간 미수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피해자 진술을 무조건 거짓으로 치부하며 부정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변호인의 역할은 그 사이에서
<더시사법률>을 구독해 주시는 분들의 편지를 읽다 보면, 유난히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변호사님, 제 사건도 제대로 봐주셨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라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혹시 내가 놓친 것이 있었을까’, ‘그때 누군가 내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해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이 녹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변호도 시작된다. 사건을 단순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현실과 맥락 속에서 들여다보는 일, 그것이야말로 변호인의 첫 번째 역할이기 때문이다. 최근 마주한 사건은 겉으로 보기엔 흔한 음주 운전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당시 의뢰인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097%였다. 법정 기준을 넘긴 알코올 수치에 이미 기소까지 이뤄진 상태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전형적인 유죄 사례다. 그러나 사건의 면면을 자세히 파헤쳐 보니, 이 사건은 보통의 음주 운전 사건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 의뢰인은 술을 마신 후 집에 돌아가기 위해 평소처럼 대리기사를 호출해 운전대를 맡겼다. 대리기사가 있었음에도 종내엔 주취자 본인이 음주 운전을 하게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문제는
의뢰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구속된 채 교도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피로가 묻은 얼굴로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라고 말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국내 건설현장에서 근로자로 일하던 베트남 국적의 외국인이었다. 의뢰인의 혐의는 매우 무거웠다. 의뢰인은 동료들과 공모하여 2000여 정에 이르는 MDMA(일명 엑스터시)를 국제우편물을 통해 수입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상황에 놓여있었다. 범행에 사용된 우편물은 실제로 적발되었고 시가는 약 5700만원이었다. 마약류관리법상 ‘수입’은 단순 투약이나 운반보다 훨씬 무겁게 처벌된다. 의뢰인은 공동정범으로 기소되었고, 유죄가 인정된다면 수년의 실형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의뢰인은 필자에게 본인의 억울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필자가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사건의 구조는 단순하지 않았다. 의뢰인은 범행 당시 동료의 부탁을 받고 단순히 숙소 인근으로 택시를 불러준 것이 전부였다. 의뢰인은 마약류가 든 국제우편물의 존재조차 몰랐고 실제 수취나 운반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즉 동료들의 범행 과정에 대해 인식하거나 공모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관계’였다. 같
의뢰인과 만나는 시점은 늘 다양하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 찾아오신 분, 검찰 조사 단계에서 찾아오신 분,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찾아오신 분…. 사건 진행 상황이 서로 다른 만큼 그 안에 담긴 사연도 제각각이다. 필자가 맡았던 수많은 사건 중 유난히 뜨거운 감자였던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당시 주요 방송사와 포털 사이트의 메인 뉴스란에 연일 보도되었기 때문에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TV 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 접하셨던 기억이 있을 것 같은데, 그만큼 사회적 관심이 컸던 사건이었다. “화장품 통에 마약 숨겨 국내 반입한 외국인 승무원들(2023. 09. 06. 연합뉴스 보도 기사 제목)”, 제목 그대로 외국인 항공사 승무원들이 화장품 통에 액상 대마를 은닉해 들여오려다 적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언론에서는 이들이 국제 마약조직에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조로 보도를 이어갔다.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서도 해당 사건에 대한 수많은 추측이 퍼졌고, 피고인들은 단숨에 ‘국제 마약 밀수범’으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필자가 의뢰인 대 변호사로서 만나 본 이들은 악랄한 범죄자로 묘사되던 보도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