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려웠던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시절, 우리 집도 풍파를 비켜가지 못했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 다. 한 지방 대학에 합격한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고, 아빠는 일을 하러 일본으로 떠났다. 엄마는 이것저것 가 리지 않고 일을 다녔다. 엄마가 보내주는 용돈은 아무리 아껴 써도 금방 바닥났 다. 학교생활은 과 대표를 맡을 만큼 적극적이고 재밌게 했다. 하지만 지방대에 다닌다는 열등감이 나를 붙잡았다. ‘더 열심히 공부할걸’ 미련 속에서 1학기를 마치고 집에 올라 왔다. 6월의 초여름, 느즈막한 시간에 한 친구가 날 찾아왔다. 나와 같이 미술학원을 다닌 친구는 좋은 대학에 진학한 후 그 학원에서 강사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가 내게 말했다. “입시 다시 해보는 건 어때? 내가 도와줄게. 같이 해보자!” “입시를 또 하라고? 그것도 반수를? 난 자신 없어.” 그렇게 돌아섰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침 아빠도 일을 마 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참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엄마, 아빠에게 무거운 마음을 털 어놓았다. “너는 너밖에 모르니?” “아직도 미술학원비가 80만 원
20여 년 전, 친구들과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 하철에서 어떤 여자 둘이 말을 건네왔다. 모르는 사람들 이었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어찌어찌 이야기 가 오갔다. 내 얼굴에 복이 가득하다던 한 여인이 물었다. “요즘 집에 안 좋은 일 있죠? 그거 본인만 해결할 수 있어 요.” 건강했던 동생이 갑작스레 아프기 시작한 데다 엄마, 아 빠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아 풍전등화일 때였다. 솔깃해 진 나는 겁도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날이 컴컴해진 지 오 래여서 중간에 주저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밑져야 본전 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에선 몇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반겼다. 나는 곧바로 도인처럼 보이는 남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희미하게 켜진 촛불 몇 개, 책상에 펼쳐진 한자 가 득한 책, 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줄 거라는 조상님들 얘 기까지, 모든 것이 내가 잘못된 곳에 왔다는 걸 대변했다. 그제야 빠져나갈 궁리를 했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였다.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어떤 이는 이미 제사상이 차려졌다고 말했다. 제사상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여하튼 조상님을 위한 것이며, 나는 가진 돈 전부를 내놓 은 뒤 절
창문 밖으로 온 세상을 다 덮을 듯, 내리는 새하얀 눈을 보고 있으니,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바로 나의 사랑하는 딸과, 아내. 눈 내리는 걸 좋아했던 아내.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을 남기는 딸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던 나. 지금쯤 길을 걸으며 당신은 딸의 손을 잡고 걷고 딸은 이곳저곳 자신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있겠지. 보지 못해도, 보이지 않아도 당신과 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보려면 수많은 날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딸 사진 뒷면에 편지를 쓰고, 당신과 딸을 생각하며 어렵게 잠을 청한다. ○○○교 아기 잠만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너를 잊을 수 있을까, 여기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아무렇지 않아지는 날이 올까. 이제는 네 얼굴조차 가물가물 하다고 덤덤한 척,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은 매 순간 네가 생각나고 네가 너무 보고 싶고 네가 너무 그립고 그때의 우리가 너무 안타깝고 그래서 우리가 어쩔 줄을 모르겠고 나는 아직도 그래! 너는 어때, 잘 지내? 나 없이도.
교도소에 수감된 지 10개월째입니다. 여전히 저는 어머님께 연락 한 번을 못 드리는 겁쟁이입니다. 면회 오시겠다는 어머님을 못 오게 하고 아직은 어머님을 뵐 용기가없다고 피하기만 하는 못난 아들입니다. 하루에 몇 번씩 어머님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너무도 보고 싶고 불러 보고 싶은 어머님이지만 좁은 면회실에서 죄수복을 입고 마주할 자신이 없고, 그런 어머님의 우시는 모습을 볼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기에 이렇게먼저 용기 내어 글을 보냅니다. 엄마, 저 때문에 아파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슬퍼하지 마세요. 정말 사랑하고 죄송합니다. 엄마, 제가 나가는 날까지 제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매섭던 겨울은 흘러간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일 년 네 철의 첫째 계절인 봄이희망과 함께 다가온다.새해 다짐했던 희망과 목표를다시 한 번 되뇌게 하는 봄,대한에 움츠렸던 사람들의 어깨는봄을 맞아 활짝 펴고얼어 있던 입가엔 따뜻한 미소가 생긴다.벌거벗었던 고목들은 거리 사람을 위해푸르른 새 옷을 준비하고,담홍 색깔 벚꽃과 노란 개나리는아름다움을 먼저 뽐내려 사투를 벌인다.꿈과 희망을 선물하는 따뜻한 봄!고귀한 생명력도 봄 준비에 활동력이 넘쳐나니,우리는 삶의 행복을 지향하고 정진해 나아가자…
어릴 적 나는 자주 아팠다. 한 번은 심한 감기를 앓다 제때 치료를 못 해 중이염으로 번졌다. 그 시절 시골 사람들이 그랬듯 저러다 낫겠거니 하고 내버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귓속에 똬리를 튼 농양은 나았다가 덧나기를 반복하며 청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어머니는 “늦게라도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는데…” 하며 평생을 한탄했다. 당시 아버지는 귀를 잘못 건드렸다가 입이 돌아간 동네 사람이 있다며 병원을 못 가게 했다. 대신 두꺼비를 잡아다 말린 후 가루를 내어 수시로 귓속에 흘려넣어 주었다. 아버지만의 확고한 치료법이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논일을 하다가 막걸리를 걸치러 집에 들렀을 때였다. 내가 공기놀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버지가 대뜸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말했다. 훗날 어머니가 말하기로는, 더운 날씨 탓에 내 귀에서 나는 고름 냄새가 심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았단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어디로 갔는지는 안개처럼 아스라하다. 다만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버스를 타 들떴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버스에서 내리자 찹쌀떡과 꽈배기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보리개떡이 최고의 간식인 줄 알았던 내게 그곳은 신세계였다.
성탄절 특사 당신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번 성탄절엔 눈이 제법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당신이 마주한 순백의 온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는 이 세상을 더럽히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눈부신 세상에 수줍어하며 이 밝은 세상을 더는 어둡게 하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나는 이곳에 남아 바닥에 쌓인 눈을 쓸어야겠지만 이번 성탄절엔 함박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 당신도 그렇게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교
보고 싶은 수미 누나에게 누나가 구속이 되어 힘든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내가 남자친구로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힘이 들 때 나도 구속이 되어 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다. 내가 출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누나에게 접견도 가고 누나가 빨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매일 부처님께 기도 드리고 아프지 말고 밥 잘 먹고 몸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랄게! 누나 곁에는 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아무 사고 없이 출소하는 그 날까지 파이팅! 사랑해, 수미 누나. 항상 누나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교
사랑, 포용 새 사람이 되어가고 있답니다. 예전에는 제가 어머님을 원망도 많이 하고 어머님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였지만 이제는 제가 어머님을 바라보는 나쁜 시선을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리고 제가 변화된 이유는 성경책을 읽고 변화된 것도 있지만 이곳에서 노트를 구입해서 한글자 한글자 정성껏 감사 쓰기를 써 내려갔더니 어느 순간부터 저의 모습도 변화되고 말을 하는 것도 변화되어서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하게 되고 좋은 생각을 하니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저희 어머니를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이정모 교도관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