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대한민국은 소위 ‘마약 청정국’으로 불려 왔다. UN은 인구 10만 명당 마약사범이 20명 이내일 경우 해당 국가를 마약 청정국으로 분류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지위를 유지하다가 지난 2021년 인구 10만 명당 마약사범의 수가 31.2명을 기록하며 탈락했다. 마약 청정국 재탈환 가능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밝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메스암페타민을 원료로 하는 필로폰 시장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 지역이 양분하여 갖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는 마약의 주요 생산지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마약 대부분이 동남아산이다. 주요 생산지와 접근성이 좋으니 거래가 늘 수밖에 없고 여기에 텔레그램과 같은 보안 기능이 강한 메신저와 암호화폐의 등장이 더해지며 국내 마약상들은 ‘마약왕’으로 성장했다.
경찰청은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국내에 마약을 밀반입하던 마약왕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현지 경찰들과 공조하여 검거 작전을 벌여왔고 일명 ‘동남아 3대 마약왕’들로 불리던 이들도 모두 검거되었다.
이중 동남아 마약밀수 최상선이었던 K는 베트남에서 주로 활동하며 국내에 마약을 반입하다 2022년 베트남에서 검거돼 국내로 강제 송환됐다. K는 2018년 10월경 베트남으로 출국해 텀블러, 트위터 등을 통해 필로폰과 케타민 등을 국내로 유통하다가 텔레그램을 사용하면서 엄청난 양의 마약을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통하기 시작했다.
K는 마약류 판매를 위해 운반책들에게 마약이 숨겨져 있는 좌표를 제공하고, 국제우편, 여행객의 소지품 등을 통해 국내로 반입시켰다. 헬멧을 뚫어 안쪽에 필로폰을 넣거나 마약이 담긴 성인용품을 매수자의 신체에 넣어 보내는 방법도 사용했다. 베트남 내에서는 위조여권을 만들고 주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한편, 대포통장과 비트코인으로 돈세탁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K는 마약 범죄 조직에 아들까지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P는 필리핀에 거주하며 상선인 K의 제안으로 마약 유통 조직을 만들었다. P는 마약 범죄와는 별개로 일명 ‘사탕수수밭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필리핀 현지 법원에서 장기 60년, 단기 57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P는 교도소에 갇힌 영어의 몸이었지만 개인실을 사용하고 휴대전화도 자유롭게 이용하는 등 VIP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이때 K와 연이 닿은 P는 수감 중인 상태에서 마약 유통 조직을 만들게 된다.
P는 두 번이나 탈옥에 성공하기도 했는데 다시 체포됐을 때 다량의 마약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는 국내에 수백억대 마약을 유통했는데, 그의 조직을 통해 모 기업 창업주의 외손녀로 알려진 H 씨에게 마약이 전달된 것으로 파악됐다.
캄보디아에서 검거돼 국내로 강제송환 된 C는 2011년 탈북한 여성으로 마약 유통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초기에는 주로 탈북자들에게 마약을 유통했다가 적발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C는 ‘고사바리’라 불리는 소규모 마약 판매상에 불과했는데 마약사범들이 모인 ‘향방’에 수감되며 마약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C는 2017년 출소 후 중국으로 출국해 북한산 마약을 취급하다 이후 본거지를 동남아로 옮겨갔다. 주로 베트남, 태국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동남아 현지에 있는 한국인들을 모아 마약 밀수조직을 만들고 SNS를 통해 마약을 유통하며 거물급 마약왕이 되었다. C의 상선 역시 K였다. 2021년 C는 마약 소지 및 밀입국 혐의로 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 캄보디아로 도주했다가 2022년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됐다.
지난해 11월, 법원은 국내 마약 공급 최상선이었던 K에 징역 25년과 80시간의 약물중독재활프로그램 이수, 6억 8900여만 원의 추징을 선고했다. 범죄수익금을 세탁한 혐의를 받는 아들에는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철창행이 결정된 것이다. 최상선의 구속 및 수감으로 이른바 동남아 마약밀수의 뇌관이 끊어진 듯하지만 필리핀 현지 교도소에 수감 중인 P의 국내 송환이 아직 남아있다.
한국과 필리핀이 맺고 있는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필리핀 정부가 임시 인도 조치에 합의해 주지 않는 이상 송환이 어려운 상황이다. P가 황제 수감생활을 하며 국내에 마약을 유통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수사당국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