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8월 6일 아침, 대전교도소에 갑자기 1급 비상벨이 울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재소자들이 노역장으로 이동하던 순간,한 재소자가 담을 넘어 탈옥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 재소자는 노역장에서 빼돌린 전선 따위로 사다리를 만들어 두 개의 담장을 넘었지만, 이내 교도관들에 잡혀 탈옥에 실패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모든 교도소 내 창문은 철제 방범창이 설치됐다. 창문을 이용해 불순한 의도로 물건들을 빼낼 수 없게 만든 조치였다. 탈옥에 실패한 이 남자에게 법원은 도주미수 혐의로 징역 10월을 추가 선고했다.
그는 2000년 9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정 모 씨였다. 정 씨는 이른바 ‘연쇄살인범의 롤모델’로 불렸다. 2004년, 20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희대의 연쇄살인마 유 모 씨가 정 씨의 범행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는 말을 남겨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것이다.
정 씨가 살인을 처음 저지른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재가로 5세 무렵 보육원에 보내졌던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15세에 보육원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리고 18세였던 1986년, 자신을 검문하던 방범대원을 칼로 찔러 살해해 12년의 소년원 생활을 했고 30세가 되어 만기출소했다.
소년원에서 출소한 그는 남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삶을 꿈꿨다. 돈을 모아 결혼도 하고 PC방을 차려 사업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절도와 강도였다. 1998년 6월 만기출소한 정 씨는 그해 9월 절도 혐의로 붙잡혀 6개월가량 다시금 옥살이를 했다.
출소 이후 그의 범행은 더욱 대담해졌다. 정 씨는 양손에 목장갑을 끼고 노약자나 여자만 있는 부유한 집을 골라 담을 넘었다. 금품을 훔치다가 피해자와 마주치면 폭력을 행사했고 급기야 살인까지 저질렀다. 주변에 보이는 흉기를 집어 들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가 하면, 흉기가 될 만한 마땅한 물건이 없을 땐 맨손으로 피해자를 때려죽였다.
그렇게 10개월간 정 씨가 살해한 피해자만 9명이나 되었다. 절도범이 연쇄살인범으로 진화한 것이다.
연쇄살인의 시작은 1999년 6월, 부산 서구의 한 가정집에서였다. 금품을 훔치다 가정부에게 발각되자 정 씨는 그 집 가정부를 실신시키고 목을 졸랐다.

3개월 뒤엔 부산 동대신동의 한 고급 빌라에 들어가 가정부를 마구 때려죽였다. 이후 울산으로 범행 장소를 옮긴 정 씨는 50대 여성과 그의 20대 아들을 살해했다. 그는 유명 기업 회장을 범행의 타깃으로 삼기도 했다. 부산에서 철강제조업체를 운영하던 70대 회장과 그의 70대 부인, 그리고 가정부까지 3명을 모두 흉기로 잔혹하게 찔러 살해했다.
이때까지 경찰은 각 사건의 연관성을 찾지 못해 용의자 특정에 애를 먹고 있었다. 10개월간 9명을 살해하고 8명에게 중상을 입힌 그가 유일하게 살려준 단 한 사람이 있었다. 아이 엄마였다. 부산 서구 가정집에서 금품을 털던 정 씨는 외출했다 돌아온 여성을 마주치게 된다. 여성이 아이가 있으니 살려달라 호소했는데 뜻밖에도 “아이를 잘 키우라”며 여성을 죽이지 않고 떠난 것이다.
이때의 생존자 증언이 정 씨 검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생존자의 신고로 용의자를 특정하고 몽타주를 제작한 경찰은 2000년 4월 천안의 한 사업가의 집에서 인질극을 벌이던 정 씨를 검거했다. 정 씨는 강도 살인으로 모은 돈을 통장에 넣어 당시 동거하던 애인에게 준 것으로 알려졌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옷 가게를 운영하는 성실한 청년인 줄 알았던 그의 정체를 뒤늦게 안 동거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평소 가정을 꾸리는 것에 집착적이었던 정 씨였기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만큼은 자신의 본색을 철저히 숨겼던 것이다. 범행 중 아이 엄마를 유일하게 살려줬던 것도 평범한 가정에 대한 그의 기이한 집착 때문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했다.

경찰에 검거된 그는 피해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이유에 대해 “내 안에 악마가 살고 있다. 악마가 한 짓이다”라는 말을 남겨 피해자 유족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2008년 법원은 정 씨의 살인죄 등 8개의 혐의를 인정해 사형을 확정했다.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 평생의 바람이었다던 그는 정작 남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목숨을 빼앗는 길을 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한 삶을 향한 집착은 연쇄살인의 동기가 되었고, 결국 스스로의 삶을 사형수로 끝맺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