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가 혼자 집에 돌아가서 그런 모든 것을 고려해서 고소나 소송을 할 용기와 의지를 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 심리적 과정도 나와 상의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법적인 문제도 아니고 당사자 본인의 내면적 세계 안에서 정리해야 하는 문제라서, 변호사로서는 개입하기도 어렵고 개입할 필요 없이 당사자에게 결심해서 결론만 알려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단 그분들이 내 의뢰인이 되면 그런 고민의 과정도 내 사무실에서 함께 해드리고자 한다. 그럴 때는 더 이상 해드릴 법적 조언은 없는 대신, 나는 정신 분석가가 내담자의 말을 경청하듯이 듣고자 애쓴다. 나는 정신 분석을 소재로 한 소설 『보헤미안 랩소디』를 쓰는 2년 동안 실제로 정신 분석을 받았다. 네덜란드 국제 재판소에 파견 갔을 때에도 융 계열의 분석가에게 1년 반 동안 정신 분석을 더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내가 직접 분석가가 되어 보려고 트레이닝 과정에 들어갔지만 본업으로 야근을 하는 일이 많아져서 중도에 하차했다. 정신 분석가는 내담자의 입장을 무조건 지지하며 편들거나 섣불리 내담자의 감정에 동조하지 않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즉, 왜 처음 선임하기 위해서 상담할 때 볼 수 있었던 대표 변호사나 파트너 변호사는 그 이후에는 연락이 안 되는지, 왜 변호사들이 내 사건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내 사건 내용도, 진행 상황도 잘 모르는 것 같은지, 왜 법정에서 변호사가 판사의 질문이나 상대편 변호사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증인 신문도 잘 못하는지, 왜 변호사를 찾는데 변호사가 아닌 직원들이 응대하는지, 왜 진짜 변호사가 서면을 쓴 것이 맞는 건가 의심스러운지 등의 답이 상당 부분 저런 구조적 현실에 있는 것이다. “변호사의 조력량 = 변호사의 능력 X 사건에 투입하는 시간”이다. 변호사의 능력은 경력, 연차, 처리한 사건 수에 대략 비례한다. 위 공식에서의 ‘변호사의 능력’은 상담만 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실제 일하는’ 변호사의 능력을 말한다. 고객이 처음 상담했던 대표 변호사나 파트너 변호사는 경력이 20년 차이지만 실제 대부분의 일은 1년 차 변호사가 한다면 그 1년 차 변호사의 능력이 조력의 총량을 결정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윤리적 문제도 초래한다. 환자가 의과대학 교수가 수술하는 줄 알고 수술대에 올랐는데 실제 집도는 대부분 1년 차 전공의가 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내 사무실을 찾아오신 분 중에서 과거에 한 번 변호사를 선임해 보았다가 크게 실망하거나 속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이분들이 변호사에 대해 하는 불만이나 불신은 대개 '불성실하다', '내 사건에 관심이 없고 잘 안 챙기는 것 같다', '열심히 안 한다', '연락도 안 된다', '처음 선임할 때와 선임한 이후가 너무 다르다' 등이다. 사람들로부터 변호사에 대한 이런 불만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런 문제들이 변호사들의 성의와 품성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작은 로펌을 경영해 보고 주변 변호사들로부터 업무 현실에 대한 솔직한 말들을 들으면서 이 문제가 상당 부분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흔히 이런 문제가 있는 구조를 ‘박리다매 수입 구조’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렇게만 말해서는 이 업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제대로 그 말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내용은 공적인 성격이고 일반인들도 이를 알면 도움이 되기에 솔직하게 말해 보고자 한다(물론 예외도 적지 않으니, 모든 경우를 일반화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규모가 어느 정도 이상 되는 많은 로펌에서 파트너 변호사들은 수임료를 받으면 로펌에 그중 6,070%를 낸다. 이 돈으
변호사가 되고 난 뒤에 또 한 가지 큰 변화는 ‘내 것’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판사 때나 법무부 심의관으로 일할 때도 내 방이 있었지만 거기에 있는 책상도, 컴퓨터도, 필통과 그 안의 연필도, 소파도, 인테리어도, 액자 속 그림도, 슬리퍼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도와주는 직원들도 내가 뽑은 것도 아니고 내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설립한 로펌에서, 내 돈으로 인테리어를 꾸민 사무실에서, 내가 산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내가 산 소파에 앉아서, 내가 골라 산 잔에 커피를 마신다. 직원들은 내가 뽑았고 매달 내가 월급을 준다. 고객들도 나를 보고 찾아왔다는 점에서 ‘내 의뢰인’들이다. 판사일 때 당사자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정재민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건이 배당된 담당 재판부의 판사를 억지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를 찾는 사람들은 그런 직함이 아니라 정재민을 찾아서 온다. 상담실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만남, 즉 인연을 맺는 일이다. 변호사와 의뢰인은 중요한 인연이다. 판사가 당사자를 만나는 것은 서로 원해서 만난 것도 아니고, 우호적인 편이 되어 주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리한 판단의 칼로 판단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나는 아침에 동네 헬스장에서 간단한 운동을 마치고 대치동 집에서 차를 몰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공직에 있을 때는 출근길에 차 안에서 항상 뉴스를 틀어놓았지만 지금은 주로 팝이나 가요 같은 음악을 듣는다. 내 사무실은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한가운데 난 왕복 8차선 도롯가에 있는 ‘정곡빌딩 남관’ 건물에 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음악을 끄고 엘리베이터에서 5층 버튼을 누르면 비로소 변호사로서의 하루를 시작하는 버튼을 누르는 것 같다. 내 방이 따로 있지만 나는 주로 상담실에 머문다. 디퓨저 향기가 은은하게 흐르는 상담실로 들어가 음악을 틀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본다. 비록 5층이지만 이 건물에서 제일 높은 층이고 비탈길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검은색 블랙박스처럼 생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청사도 보인다. 늘 같은 건물이었을 터인데 최근에 검찰권이 약화하면서 왠지 과거보다 건물이 작아져 보인다. 흔히 변호사들이 고객과 상담하는 회의실은 밝은 형광등 아래 업무용 회의 테이블과 회전하는 업무용 의자들이 마주 보고 놓여 있다. 그렇지만 나의 상담실은 형광등을 다 없애고 검은색 갓을 씌운 주황색 벽열등 조명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이라는 획기적인 소설을 냈을 때, 프랑스 평론가 롤랑 바 르트가 ‘건전지의 발명’에 맞먹는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저는 더 시사법률이 창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또 “지금까지 우리를 위한 신문은 없었다”는 창간 호의 캐치프레이즈를 보았을 때, 그 ‘건전지의 발명’을 떠올렸습니다. 반짝반짝 한 아이디어와 폭발력 때문이었습니다. 왜 이런 신문이 없었을까. 더 놀란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기존 신문 내용을 대강 짜깁기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뜻밖에도 내용이 알찼습니다. 이런 수준의 신문을 이렇게 자주 낼 수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역시 구독자 수의 가파른 증가는 파죽지세였습니다. 겨우 1년밖에 안 되었나 싶습니다. 그 초기부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영광이고 보람이었습니다. 2년 차에는 ‘자동차의 발명’을 연상하게 만드는 발전을 기대합니다.
휴가로 온 발리 여행의 마지막 날 스미냑 해변에서 쓰고 있다.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따뜻하고도 시원한 바람을 서핑하듯 타고 와서 내 뺨에서 부서져 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다. 해가 떨어지면서 하늘은 이런저런 열대 과일을 뒤섞어 놓은 다채로운 빛깔의 칵테일 색으로 변해가서 긴 빨대를 꽂으면 단물이 주루룩 흘러나올 듯하다. 발리를 낙원이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귀국하자마자 구치소로 가서 의뢰인들을 접견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문득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케로보칸(Kerobokan)’ 교도소가 바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낙원 같은 발리와 대조적으로 이 교도소는 과밀수용으로 유명하다. 정원이 300명 정도인데 수감자가 1600명이 넘는다. 이곳에 있는 수용자들은 거의 80%가 마약 사범이고 10% 이상이 외국인이다. 과밀수용과 열악한 환경 때문에 수용자들에게 정신병, 자살, 전염병도 많다. 반면, 이들을 지키는 교도관은 십수 명에 불과하다. 그러니 탈옥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1999년에는 289명이 탈옥했다가 하루에 104명이 잡히고 185명이 도주했다. 2017년에는 4명의 수용자가 땅굴을 파고 배수로를 통해서 탈옥했
구속된 수용자의 변호를 맡는 경우 대개 가족이 찾아와서 선임 계약을 한다. 구속된 사람이 가족이나 믿을 만한 조력자가 없으면 좋은 변호사를 찾아서 선임하기가 쉽지 않다. 좋은 변호사를 찾으려면 이곳저곳 알아보러 다니면서 정보도 얻고, 평판도 조회하고, 직접 변호사들을 만나 보기도 하고, 수임료 흥정도 해야 하고, 수임료 대납도 해야 하는데 이 모든 일을 대신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가 않다. 사실 가족이라도 이런 일을 다 해 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속이 되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극도로 제한된다. 밖에서 제아무리 잘 나갔고, 돈과 권력이 있었고, 똑똑했더라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수의를 입고 수감되면 무기를 빼앗기고 포로가 된 장수처럼 무력화된다. 그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멀스멀 솟아오르기도 한다. 폐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좁은 공간에 갇히는 것 자체로 형벌을 받는 듯 괴로울 것이다. 그만큼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은 이런 감정적 어려움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하루하루 새로운 일상을 살고 헤쳐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수용자가
변호사가 되어 보니, 재판장과 인연이 있는 판사 출신 변호사를 찾아서 일종의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분들도 적지 않게 본다. ‘재판장과 말이 통하는’ 변호사를 찾는다고도 한다. 여기서 ‘말이 통한다’는 것은 재판장과 사적으로 잘 알아서 전화를 걸거나 따로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판사들 숫자도 적어서 서로 가까웠고, 판사 출신 변호사들이 현직 판사들과 술 한잔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건을 좀 더 잘 봐주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에 3천 명이 넘는 판사들이 있어서 동기라도 서로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보다 요즘 판사는 정년까지 법원에 머물러 있는 추세이다. 판사들 입장에서는 변호사 일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은 마당에, 잘 알지도 못하는 판사 출신 변호사라고 괜히 형량을 깎아주고 승소시켜 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현직 판사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 판사들이 재판하는 사건을 수임한다고 해서 잘 봐 주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 입장에서도 사건 이야기를 하는 순간 관계가 어색해지고 체면이 깎인다. 이것이 현실이다. 간혹 재판장이 내 동기라고 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