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예문정앤파트너스] 변호사의 일기 (2)

 

변호사가 되고 난 뒤에 또 한 가지 큰 변화는 ‘내 것’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판사 때나 법무부 심의관으로 일할 때도 내 방이 있었지만 거기에 있는 책상도, 컴퓨터도, 필통과 그 안의 연필도, 소파도, 인테리어도, 액자 속 그림도, 슬리퍼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도와주는 직원들도 내가 뽑은 것도 아니고 내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설립한 로펌에서, 내 돈으로 인테리어를 꾸민 사무실에서, 내가 산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내가 산 소파에 앉아서, 내가 골라 산 잔에 커피를 마신다.


직원들은 내가 뽑았고 매달 내가 월급을 준다. 고객들도 나를 보고 찾아왔다는 점에서 ‘내 의뢰인’들이다. 판사일 때 당사자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정재민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건이 배당된 담당 재판부의 판사를 억지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를 찾는 사람들은 그런 직함이 아니라 정재민을 찾아서 온다.


상담실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만남, 즉 인연을 맺는 일이다. 변호사와 의뢰인은 중요한 인연이다. 판사가 당사자를 만나는 것은 서로 원해서 만난 것도 아니고, 우호적인 편이 되어 주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리한 판단의 칼로 판단하려 만나는 것이다. 판사에게 당사자는 인간적 ‘관계’라기보다는 ‘업무의 대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변호사가 된 지금은 내가 의뢰인과 가족 못지않은 아주 깊고 중요한 관계 속에 있다고 느낀다. 내 의뢰인들은 남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그것은 때로 비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을 내게 털어놓는다.

 

내가 그를 믿어 주면 그는 더 큰 힘을 낸다. 나도 내 가족이 같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못지않게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부당함, 불공평함, 억울함, 좌절감을 전이해서 느낀다. 의뢰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변호사라는 가장 가까운 조력자로서 발목을 서로 묶은 이인삼각 달리기처럼 의뢰인과 같은 편이 되어서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의뢰인에게는 물론, 변호사에게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미국의 과학자 칼 세이건의 ‘코즈믹 캘린더’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 138억 년을 1년짜리 달력으로 환산했을 때 우주가 1월 1일 0시에 탄생했다면 46억 년 된 지구는 9월 14일에 탄생했고, 공룡은 크리스마스에 등장했으며, 호모사피엔스는 12월 31일 밤 10시 반에 처음으로 태어났고, 예수는 12월 31일 밤 11시 59분 56초에 태어났다.

 

이 캘린더 기준으로 인간의 수명 70살이라는 것은 0.15초에 불과한데,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시간대에 공존할 확률은 365일×24시간×60분×60초 분의 0.15에 불과하다.

 

공간적으로도 그렇다.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서초동에서, 그 많은 변호사 사무실 중에서 내 사무실에서 두 사람이 만나서 마주 앉아 있는 것 자체도 기적 같은 일이다. (같은 이유로 이 글을 지금 누군가가 읽어 주고 있다는 것도 기적 같은 인연이다)


판사일 때는 사건이 들어오는 순서에 따라 자동으로 내게 배당되었다. 형사재판부가 3곳이면 들어오는 사건 번호 순서대로 재판부가 1, 2, 3, 1, 2, 3, 1, 2, 3 이런 식으로 배당된다.


내가 재판을 받는 당사자를 선택할 수도 없고 재판받는 당사자가 나를 판사로 선택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불공정한 것이다. 반면, 변호사와 의뢰인은 서로를 선택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할 때 변호사가 변호사가 되고 의뢰인이 의뢰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뢰인의 인연을 맺으면 판사일 때 재판 당사자를 보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 상담을 위해서 내 사무실을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반갑다. 의뢰인과 변호사의 첫 만남은 맞선 같은 성격이 있다. 첫째, 둘 다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 아주 중요한 인연을 찾는 일이다.

 

둘째, 일단 함께 길을 떠나고 난 뒤에는 원상태로 무르기가 매우 어렵다. 셋째, 결혼 생활도, 재판도, 함께 길을 가보기 전에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의뢰인으로서는 어쩌면 맞선을 통해 배우자를 고르는 것보다 변호사를 고르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좋은 배우자감은 한 번 보고 확신이 안 들면 거듭 만나 보면 되지만 변호사는 거듭 만나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좋은 변호사를 고르기를 어렵게 만드는 핵심은 변호사와 같이 일해 보기 전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같은 기계는 제각기 품질이 균일하지만 법률 서비스는 변호사라는 사람이 제공해 주는 것이라서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사건마다, 상황마다, 받는 수임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람 마음은 겉으로 확인이 어렵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를 찾는 사람들은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기 위해 나를 찾아온 분들은 대화를 나누면서 부지런히 나를 살핀다. 내가 실력이 있어 보이는지, 내 눈빛이 또렷하고 언변이 좋고 기세나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지, 자신의 재판을 맡을 판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던진 질문에 조리 있게 답변을 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본다. 반대로 나도 상대가 내가 변호를 해 드릴 만한 분인지를 살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변호하는 사람이 진짜 억울한가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도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변호사들에게 변호사의 사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to bring justice’)라고 답한다.

 

반면, 우리나라 변호사들은 변호사의 사명이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우리가 당사자 개인의 감정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억울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정의에 반하는 일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소수의 사건만 선임하면서 직접 서면을 쓰고 변론하면서 40대 후반이라는 인생의 황금기이자 변호의 전성기의 삶의 한 토막을 그를 위해 살아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 억울한 분을 돕는 데 인생을 쓰고 싶다.

 

의뢰인이 진짜 억울할수록 재판을 승소해서 성공보수를 받을 가능성도 높아지니 실리적 측면에서도 진짜 억울한 분을 돕는 것이 낫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