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변호사님, 경찰 출신이시죠?” 상대는 수사를 받고 있다며 담당 수사관이 경찰대 출신이라 혹시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요컨대, 인맥을 써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같은 경찰대 출신이라도 혐의가 확실한 사건은 봐줄 수 없습니다. 그런 기대라면 선임할 필요 없어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보통 의뢰인들은 경찰 출신, 전관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사건이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은 경찰대 3년 후배였다. 매년 정기모임에서 만나는 사이였고 아끼는 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선후배 관계가 있다고 해서 사건이 잘 마무리되거나 혐의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내 경험상, 경찰, 전관출신 변호사는 그해당 직무를 수행해 봤기에 수사기관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어떻게 싸우려는지, 그 흐름을 읽을 줄 알고 의뢰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흐름을 대처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직접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약속을 잡고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은 두 명, A와 B였다. 사건 내용은 차깡 범죄였다. 신용이 좋은 사람의 이름으로 무담보 대출을 받아 신차를 구입한 뒤, 바로 중고차 매매상에 넘기고 대출금을 가로채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캐피탈 대출은 담보가 잡히지만, 이들은 무담보 대출이라는 점을 악용했다.
두 사람 중 B는 돈만 전달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경찰 수사망에 걸려 있었다. 반면, 주범으로 지목된 A는 태도가 이상했다. 사건을 설명하는 동안 대부분의 이야기는 B가 했고, A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심지어 관련 용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출석일에 A와 함께 동행하였다. A는 모든 혐의를 인정하며 자신이 주범이라고 자백했고, B는 단순히 돈을 전달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조사가 끝났고,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수사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선배님, A가 주범 아닌데요? 이 사건 관련자도 아닌데…” 나 역시 같은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의뢰인과의 관계상 수사관에게 쓴 웃음으로 답하며 경찰서를 나섰다.
수사관은 오랜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었다. A의 태도가 어색하다는 것을 단번에 간파한 듯했다. 문제는 증거였다. 이미 범죄 수익금이 A의 통장으로 들어갔다는 명백한 기록이 있었고, 무엇보다 A 본인이 주범이라고 자백한 상태였다. 수사관은 B를 이미 조사 끝내고 검찰 송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A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혼란과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변호사님, B가 어제 자살했어요. 근데 저…사실 주범이 아니에요. 통장만 빌려줬어요. 진짜 주범은 따로 있어요. B가 저보고 허위로 자백하라고 해서, 3천만 원 준다고 했는데… 돈도 못 받고 이렇게 됐어요.” 나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A가 허위 자백을 한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B는 실제 주범 C라는 인물과 오래전부터 차깡 범죄를 저질러 왔다. 실제 주범인 C는 이미 다른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 중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더 추가되며 징역형이 늘어날 위기에 처한 C는 B에게 “돈 2천만을 줄테니 너가 다 뒤집어써라”고 지시했다. B는 수사기관에 허위 자백을 하고 불구속 재판중이였는데, 또 다른 사건이 추가되면서 가중처벌 위기에 놓이게 되자 대포통장을 대여해준 지인 A에게 “너가 주범이라고 해라, 대신 3천만 원을 줄게”라고 회유한 것이었다.
B는 그날 밤,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유서를 남겼다. “모든 건 C가 시켜서 한 일이다. A는 주범이 아니다. 나도 억울하다.” 나는 A에게 말했다. “현재 상태로는 허위 진술을 한 것이기에 범인도피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주범으로 실형을 받을 겁니다. 경찰에게 사실대로 자백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결국 A는 진실을 털어놓았고, 실제 주범 C는 추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A는 범인도피죄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사람들은 범죄를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한다. 바지사장을 내세우고 거짓말로 자신을 감추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드러난다. B의 선택은 안타까웠지만, 그의 유서는 사건의 열쇠가 되었다.
범죄는 아무리 감춰도, 결국 그 흔적이 남는다. 숨기려고 할수록 더 큰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진실은 언제나 스스로 빛을 발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범죄는 끝내 더 큰 대가로 되돌아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