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소년수형자들과 함께 했던 생활을 마무리하고 총무과로 이동하게 되었다. 새롭게 담당한 업무는 영치품 업무였다. 영치 업무는 단순한 듯 보이지만 꼼꼼함과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업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보안과장이 나를 불렀다.
“SOFA 수용자를 영치 청소부로 데리고 있을 수 있겠나?”
나는 뜻밖의 제안에 당황해 물었다.
“제가 영어도 못 하는데, 미국인 수용자들을 어떻게 데리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한국어를 잘하니까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을 거야. 지금 SOFA 수용자 10명이 공장에도 출역하지 않고 사동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래서 공장으로 보내려 했는데, 굿리치와 램지라는 두 명이 영치 청소부로 일하고 싶다고 하더군. 너도 영치 업무가 많으니 데리고 일해봐.”
그렇게 해서 나는 SOFA 수용자 굿리치와 램지, 그리고 한국인 수용자 한 명을 영치 청소부로 데리고 다니며 일을 하게 되었다. 굿리치와 램지는 시작부터 내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특히 자신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점에 대해선 거침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따졌다.
서로가 낯선 가운데 교도관과 수용자라는 관계도 있어서 처음부터 좋은 팀워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굿리치와 램지가 영치 청소부로 출력한 지 2년쯤 되었을 무렵, 나는 SOFA 수용자 케네스 마클과 영치품 문제로 다투며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마클은 동두천 윤금이 살해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을 받고 복역 중인 SOFA 수용자였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포악하며, 교활한 면도 있었다. 가족이 보내온 영치품 중 규정에 어긋나는 물품이 들어올 때마다 영치시킨다는 말을 들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물건을 발로 밟아 부숴버리거나 찢어버리며 폐기 처분하라고 소란을 피우곤 했다.
하루는 마클이 또다시 영치품 문제로 격분하며 난동을 부렸다. 그의 행동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화를 내며 그를 꾸짖었다. 마클은 더욱 소리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램지가 갑자기 마클을 불러 벽에 세우더니 나에게 함부로 행동한 것에 대해 심하게 꾸짖었고 마클은 고개를 숙인 채 램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잠시 후 마클이 내게 와서 정중히 사과했고 마클과의 사건 이후, 마클을 비롯한 SOFA 수용자들의 소포 중 영치 규정에 맞지 않는 물품이 들어오면 굿리치와 램지가 수용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했고 이후 영치품으로 다투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어느덧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꽤 훌륭한 팀이 되어 있었다.
굿리치는 덩치는 컸지만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면서 때때로 많이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도 그거 할 수 있는 건 가족사진을 손에 쥐고 우는 일뿐이었다. 그러던 1998년 여름, 굿리치가 갑자기 격앙된 태도로 내게 항의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내가 소리치자 굿리치는 흥분해서 말했다.
“같은 SOFA 수용자가 살인을 저질렀는데 1년밖에 안 살고 나간대요! 나는 15년을 살고 있는데, 왜 그는 1년 만에 나가냐고요?“
굿리치는 동거녀 살인 혐의로 복역 중이었고, 굿리치가 말한 SOFA 수용자는 패터슨이었다. 굿리치는 동거하던 한국인 여자 김미정이 다른 한국인과 결혼한다며 헤어지자 말하자 김미정을 아내로 생각했던 굿리치는 화를 참지 못했고 그녀를 목 졸라 살해 한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패터슨은 이미 언론에서 크게 보도되며 유명해진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의 용의자였다.
1997년,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한 대학생이 칼에 찔려 살해당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현장에는 두 명의 용의자가 있었고 한 사람은 증거 부족으로 무죄, 나머지 한 사람인 패터슨은 증거 은닉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은 결국 진범이 누구인지 규명되지 않은 채 잊히기 시작했다.
이에 굿리치는 본인은 10년 넘게 복역하며 가석방 받을 날만 기다리며 지내고 있는데 살인 용의자 패터슨이 1년여 만에 출소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길이길이 날뛰는 굿리치에게 한국의 판사, 검사가 사건을 잘못 처리했을 리가 있느냐며 자제시켰지만 그는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 자식은 살인을 저질렀어요! 그 자식이 하는 말을 내가 분명히 들었다고요! 그가 어떻게 1년 만에 나갈 수 있죠?”
17년 전 굿리치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패터슨이 수감 동료들에게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자랑하며 본인이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을 저지른 갱스터라고 자랑했던 것이다.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굿리치가 난리를 피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5년, 굿리치의 말은 진실이 되었다. 패터슨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재수사가 이루어진 끝에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국내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나는 해당 사건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당시 굿리치가 얼마나 답답했을지가 생각나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를 좀 더 깊이 이해해주지 못했던 점이 미안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을 넘어, 우리 사회의 법과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굿리치와 패터슨, 그리고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은 내 교도관 생활 중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