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내는 이곳 방에는 마흔 개의 하늘이 있습니다. 밖을 바라보는 창에 차가운 쇠창살이 드리워져 하늘이 마흔 개로 조각나 보이는 탓입니다. 넓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는 탓인지 생각도 점차 얕아져, 어머니의 가슴에 또 하나의 상처를 남겨드렸네요. 어찌해야 할까요? 지금 제 눈가에 어룽어룽 맺힌 이 눈물이 어머니 가슴에 얼룩진 상처를 지울 수 있을까요? 매번 드리는 죄송하다는 말이 오늘도 역시 못난 아들의 인사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매번 어리석음에 취해 무엇인지 알면서도 아직까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저는, 언제쯤이면 어머니와 침묵 속에서도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누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정을 넉넉히 나눌 수 있게 될까요? 제 나이가 벌써 40대 후반입니다. 그런데도 투정을 부리며 삶의 비포장길을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오늘 무슨 생각을 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셨나요? 감사 쓰기를 하면서 소장상을 안겨드리고 환히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머릿속에 감사를 채우려 분투하기 전에 모자란 인성을 채우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오늘 접견실을 나서며 깨달았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표현은 못 했지만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나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장하면서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건축 설계 회사에 취업해 열심히 일했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에 비하면 승진도 빨랐고, 모든 것이 너무나 순조롭게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결혼을 했고,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했던 힘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처음 아내의 과거를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방황했고, 어떻게든 감당해 보려 했으나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부부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에는 이혼까지 하게 되면서 인생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좋지 않은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셨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내다 한순간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구속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이곳에서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가슴이 너무나 답답하고 이게 정말인지 알 수 없어 부끄럽다. 분명한 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나다운 모습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숱하게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답게 살아가는 건 어떤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남은 날들은 최선을 다해서,
안녕하세요. 저는 2년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재판을 받은 끝에 형이 확정되어 최근 기결수가 된 사람입니다. 항소에 상고를 거치며 여러 교도소를 오갔는데, 그 과정에서 정말 다양한 분들을 만났습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중형을 선고받고 그동안 일궈온 모든 노력이 순간 물거품이 되어 삶의 의욕마저 상실한 분도 있었고, 2년여 전 교도소에서 만날 무렵 출소하고 사회 복귀를 했었는데 몇 달 만에 다시 죄를 짓고 들어와 금방 교도소에서 재회한 분도 있었습니다. 또 30년간 공직 생활을 한 공무원이었는데, 뇌물수수죄로 재판을 받으며 그동안 쌓은 커리어가 무너진 분도 생각납니다. 이처럼 삶이 무너진 이들을 보며, 개인적으로 저 자신에 대한 깊은 상실감과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 지독했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교 1등을 목표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높은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 취준생 시절에는 대기업을 목표로 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방향을 설정하는 것보다는 남들보다 앞서갈 수 있도록 속도를 내는 것에 치중하게 됐습니다. 몇 번의 실패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실패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한 번에 큰돈을 벌어들이
저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형을 산지 2년이 되어가는 수용자입니다. 올해 40세이고, 동갑내기 아내와의 사이에 6세 남자아이를 두었습니다. 현재 안양교도소 취사장에서 수용자들의 밥과 국을 만드는 ‘주걱조’에 속해있으며, 국과 찌개를 담당하는 기결 출역수입니다. 작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감정이 격앙된 채 쓴 아내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아내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인, 장모님과 함께 아동복 제조·판매업을 하고 있는데, 제가 이렇게 되면서 자기도 버텨보다 더는 장사를 유지하기 힘들어 개인회생 절차를 밟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들이 태어난 해부터 지금까지 계속 힘들게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장사를 하다가 폐업한 후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갔고, 아내는 집에서 육아를 하다가 다시 야시장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일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하니…. 한숨이 나왔습니다. ‘난 왜 사기 조직의 출금책을 한 걸까?’, ‘왜 내가 한 걸로도 모자라 지인에게 일을 소개시켜 주기까지 했을까?’ 엄마가 힘들면 아이의 세상은 무너진다는데, 이 편지를 받은 후 며칠간은 죄 지은 것에 대한 후회와 앞으로의 걱정에 빠져 자괴감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낙심
안녕하세요, 2공장 여러분! 저 ‘빵도’입니다. 그동안 함께 지냈던 몇몇 분들에게 사과와 더불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펜을 잡 습니다. 일단 제일 먼저 반장님. 반장님, 그동안 제가 공장에서 난동도 몇 번 부리고 힘들게 해드렸었죠. 울고 떼쓰고 욕하고 밀치고 했던 것 다 죄송해요. 진심으로요.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그때 했던 행동들이 다 후회되네요. 있을 때 잘할 걸…. 정말 죄송하고,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그전 일은 부디 다 잊어 주시고, 남은 시간 동안 2공장을 잘 이끌어 주세요. 그리고 우리 호돌이 형. 형에게 장난을 많이 쳤는데, 욕하고 대들고 울고 떼쓴 것 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항상 감사했어요. 형을 잊지 않을게요. 또 개미 형, 형에게도 장난을 많이 쳤었죠. 밀치고 난동 부리고 했던 것들 다 죄송합니다. 제 딴에는 애정표현 이었는데, 형은 싫으셨겠죠. 그래도 지금은 형이 많이 생각나네요. 형의 소식을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저 잊지 마세요. 보고 싶고 사랑해요. 출소한 두꺼비 삼촌도 너무 보고 싶어요. 2방에 있는 곰돌아, 잘 지내지? 형이 없어져서 힘들겠지만 조금만 버티다가 사회에서 보자. 그동안 고마웠고, 친구도 잘 챙기고!
합천에서 생활하시는 건 어떤가요? 만족스러우신가요? 평소 도시를 떠나 공기 맑고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비로소 소원 성취를 하셨는지 3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여쭤보네요. 합천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상황들은 제외하고 순수 시골 생활만 놓고 보았을 때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구치소 안에서 시간 안죽이고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등한시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파옵니다. 하지만 간혹 당신 스스로 전해주시는 소식들, 당화혈색소 수치가 감소했다거나 12인승 차량 운전도 능숙해졌다는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합천에서 나름 잘 이겨내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얼마 전 신문에서 치매 예방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 두었는데 당장은 어머니의 치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머니의 모든 행동들이 못 미더워 일일이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겨우 마음이 놓이곤 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알아서 잘 해내시는 분이라는 걸 요즘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는 못 미덥단 감정은 많이 내려놨는데, 대신 그 자리가 애틋함으로 채워진 것 같아요. 어머니의 2025년은 어
저는 구치소에서 재판 진행 중인 닉네임 ‘바보 온달’이라고 합니다. 애인과 같이 재판을 받는 중이라 애인에게 힘을 내라는 뜻에서 사연을 적습니다. 여자 친구는 4층에서, 저는 8층에서 지내는 터라 서로 보지는 못하지만 이 글을 보고서 힘을 냈으면 합니다. 2023년 3월 14일 화이트 데이, 해운대 볼락집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당신의 분홍색 스웨터를 보고 난 첫눈에 반했지. 나와 나이 차이가 열네살이나 되는데 나를 좋아해 줄까 하는 불안감에 안입던 콤비 정장을 입고 사탕을 들고서 당신을 기다렸지. 4차로 방문한 해운대 앞 노래 주점에서 내가 임영웅의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부를 때 등 뒤에 서서 나를 안아 준 당신의 따스함 덕에 우리 사랑이 시작되었어. 2년이란 시간을 함께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당신에게 너무 모자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나와 함께 당신까지 이곳에 들어오게 했다는 죄책감에 힘이 들고 많이 미안할 뿐이야. 있을 때 잘하란 말도 떠오른다. 왜 그렇게 못했을까? 당신을 만난 건 정말 내 인생에 둘도 없을 행운이었어. 소중한 나의 보석 같은 샤랄라 공주님. 꽁꽁 숨겨 주머니에 담아 다니고 싶은 나의 천사님
용찬아,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중학교 1학년 때였지. 난 무척 낯을 많이 가려서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내가 실수로 중심을 잃은 걸 우연히 본 너는 “풋” 하면서 웃었어. 그리고 우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어. 중학교 3학년 때 내 생일에 네가 준 선물, 그리고 너의 츤데레스러움이 아직도 기억난다. 우린 성인이 된 후에도 늘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어. 술도 같이 마시고, 밥도 먹고, PC방도 가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했지. 그런데 내가 참 어리석게도 이상한 데 빠져서 너를 멀리하고, 혼자서 점점 엇나갔어. 그래도 넌 내게 뭐라 하지 않았지. 그리고 난 결국 구속됐고, 너도 이제 날 욕하고 떠날거라 생각했어. 근데 넌 내게 직접 편지도 써주고, 접견도 와줬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음속으론 수십 번을 물었어.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렸지만,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내 10대 초부터 20대를 함께한 친구 용찬아,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미안하고 잘 살길 빈다!
혼자서 자식을 키우는 당신, 당신을 사랑하고 힘들었던 삶도 마냥 좋기만 했어. 2명의 쌍둥이 딸과 아들 셋, 그리고 또 딸을 낳아 키우며 어려움에도 앞만 보며 달려오던 우리였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삶에 사랑이 사라지게 되었어. 사랑 또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지. 나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1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은 뒤로 망연자실한 채 가족을 잃고 밑바닥까지 내려가며 과연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 아이들과 함께한 10년간 그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고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내 삶에 결코 후회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 비록 지금은 이렇게 당신과 여섯 남매를 잊고 살아가야 하지만, 당신, 아이들과 함께했던 그 10년은 나에게는 결코 잊지 못하는 시간이야. 행복했던 그때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아. 형량을 다 마치고 나면 당신은 늙어있고 아이들은 다 커있겠지. 딱 한 번만이라도 당신과 아이들을 다시 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루하루 반성과 속죄를 하며 살아가고 있어. 후회 없는 10년을 살게 해준 당신, 그리고 여섯 아이들에게 고마워. 늦었지만 사랑했었다고 전하고 싶어.
안녕하세요. 저는 아직 재판을 받고 있는 미결수입니다. 바깥에 결혼을 약속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들어오게 되어 해당 코너를 통해 사연을 남겨봅니다. 안녕, 자기야. 나야, 집토끼 주인. 결혼식장, 스드메, 예식 날까지 다 잡아놓고 갑자기 구속되어서 자기도 황당했을텐데 바깥에서의 일은 잘 처리해 보겠다고, 어떻게 되든 기다릴 거라고 먼저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 노는 거 좋아하고 술 마시는 거 좋아하는 자기인데, 나 걱정할까 봐 집에서 얌전히 있는 집토끼 할 테니까 나오면 풀어달라던 너…. 매일 편지 써주면서 이걸로 세레나데 할 테니 프러포즈는 나와서 내가 하라던 너…. 여기서 잘 있다가 나가면 내가 프러포즈도 하고, 기다려 준 만큼 잘해줄게. 왕자님처럼 사는 동안 잘 모실게요! 항상 힘이 되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예비 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