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섭던 겨울은 흘러간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일 년 네 철의 첫째 계절인 봄이희망과 함께 다가온다.새해 다짐했던 희망과 목표를다시 한 번 되뇌게 하는 봄,대한에 움츠렸던 사람들의 어깨는봄을 맞아 활짝 펴고얼어 있던 입가엔 따뜻한 미소가 생긴다.벌거벗었던 고목들은 거리 사람을 위해푸르른 새 옷을 준비하고,담홍 색깔 벚꽃과 노란 개나리는아름다움을 먼저 뽐내려 사투를 벌인다.꿈과 희망을 선물하는 따뜻한 봄!고귀한 생명력도 봄 준비에 활동력이 넘쳐나니,우리는 삶의 행복을 지향하고 정진해 나아가자…
어릴 적 나는 자주 아팠다. 한 번은 심한 감기를 앓다 제때 치료를 못 해 중이염으로 번졌다. 그 시절 시골 사람들이 그랬듯 저러다 낫겠거니 하고 내버려 둔 것이 화근이었다. 귓속에 똬리를 튼 농양은 나았다가 덧나기를 반복하며 청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어머니는 “늦게라도 병원에 데려갔어야 했는데…” 하며 평생을 한탄했다. 당시 아버지는 귀를 잘못 건드렸다가 입이 돌아간 동네 사람이 있다며 병원을 못 가게 했다. 대신 두꺼비를 잡아다 말린 후 가루를 내어 수시로 귓속에 흘려넣어 주었다. 아버지만의 확고한 치료법이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논일을 하다가 막걸리를 걸치러 집에 들렀을 때였다. 내가 공기놀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버지가 대뜸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말했다. 훗날 어머니가 말하기로는, 더운 날씨 탓에 내 귀에서 나는 고름 냄새가 심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았단다.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버스에 올랐다. 어디로 갔는지는 안개처럼 아스라하다. 다만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버스를 타 들떴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버스에서 내리자 찹쌀떡과 꽈배기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보리개떡이 최고의 간식인 줄 알았던 내게 그곳은 신세계였다.
성탄절 특사 당신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번 성탄절엔 눈이 제법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당신이 마주한 순백의 온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는 이 세상을 더럽히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눈부신 세상에 수줍어하며 이 밝은 세상을 더는 어둡게 하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나는 이곳에 남아 바닥에 쌓인 눈을 쓸어야겠지만 이번 성탄절엔 함박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 당신도 그렇게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교
보고 싶은 수미 누나에게 누나가 구속이 되어 힘든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내가 남자친구로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힘이 들 때 나도 구속이 되어 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너무 크다. 내가 출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누나에게 접견도 가고 누나가 빨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매일 부처님께 기도 드리고 아프지 말고 밥 잘 먹고 몸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랄게! 누나 곁에는 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아무 사고 없이 출소하는 그 날까지 파이팅! 사랑해, 수미 누나. 항상 누나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교
사랑, 포용 새 사람이 되어가고 있답니다. 예전에는 제가 어머님을 원망도 많이 하고 어머님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였지만 이제는 제가 어머님을 바라보는 나쁜 시선을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리고 제가 변화된 이유는 성경책을 읽고 변화된 것도 있지만 이곳에서 노트를 구입해서 한글자 한글자 정성껏 감사 쓰기를 써 내려갔더니 어느 순간부터 저의 모습도 변화되고 말을 하는 것도 변화되어서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하게 되고 좋은 생각을 하니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저희 어머니를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이정모 교도관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교
그리운 어머니에게 저는 베트남 국적으로 한국에 온지는 9년째입니다. 베트남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있습니다. 저에게 한국은 정말 고마운 나라입니다. 저희 가족을 그 동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해주고 또 많은 기회도 주었습니다. 현재 어머님은 몸이 아프셔서 그 동안 제가 매달 보내주는 돈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나이 어린 동생과 홀로 병마와 싸우고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로 밤을 보내곤 합니다. 편지에 제 걱정만 하고 계시는 어머님께 지금껏 한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합니다.” 먼곳에서 어머니께 아들 ○○ 올림 * 한국말이 서툴러서 방 사람 도움을 받아서 보냅니다. ○○○교
“아빠도 한 개 줘야지.” “싫어. 내일 아침에 먹을거야!” 퇴근 후 집에 왔더니 딸이 장인어른에게 소리를 꽥 지르고 있었다. 붕어빵 때문이었다. 장인어른은 집에 올 때 마다 붕어빵을 한 봉지씩 사왔다. 식탐이 많은 딸은 나눠 먹자는 장인어른의 제안에 언제나 완강히 거절했다. 며칠 내내 붕어빵을 독차지 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딸은 선심쓰듯 하나를 내게 권했다. 머리 부분을 한 입에 베어 물자 30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 손을 잡고 치과에 다녀온 날이었다. 엄마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엄마도 일을 하게 됐으니 맛있는거 많이 사 줄게.” 가정에 소홀한 아빠를 대신해 엄마는 가사 도우미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 집안일까지 했다. 그런 생활은 10년 넘게 이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까지 학원을 다니지 않은 나는 서너시 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를 기다렸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 하고 문 앞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힘들게 번 돈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왔다. 겨울에는 주로 붕어빵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한 마리라도 더 먹고 싶어 욕심을 부렸다. 내 딸이 그러는 것처럼. 엄마는 그때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
구속된 1년 전 이맘때… 생각할수록 후회와 미련만 가득했었던 9월. 일전에 다친 상처가 채 낫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상처가 추가되어 버렸다. 20년… 이 길 끝에 무엇이 보일진 모르지만, 이 작은 펜 하나를 집어 들고서 과거의 나와 지금부터의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그려본다. 네 마음 다 안다. 하나하나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는 거. 누군가는 한꺼번에 다 누리려고, 또 많이 가지려다 그나마 가졌던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거나, 너처럼 아무리 아등바등거려도 뭔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거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내 편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 세상 사람 모두 내 편이 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교
구독 1위 달성 축하드립니다. 처음 신문을 접했을 때 이 신문은 혁신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B 로펌 기사 잘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달 전 보낸 ○○○ 변호사는 아직 기사가 안 나오나요? 답변이 없으시네요. 되도록 실명까지 시원하게 더 시사법률에 나와서 전 재소자가 보았으면 좋겠네요. 변호사들은 정말 저희를 돈으로만 생각하지, 제가 있는 방에서도 저 같은 피해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추가 건이 붙을 때마다 돈을 요구하고, 접견 때만 오고, 재판 때는 보이지도 않고, 새끼 변호사가 일하고… 변협에 진정도 넣어 봤지만 답변도 없네요. 한 번은 술이 취해서 술 냄새를 풍기면서 오질 않나… 이런 사람을 선임한 제 잘못이지만, 재소자들은 구속이 되면 선택권이 제한되어서 처음 “집행유예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에 눈에 보이는 건 그 변호사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변호사가 아무것도 안 하고 3년을 받은 게 억울하고 분하네요. 정말로 더 시사법률이 재소자들의 감시자가 되어서 이런 변호사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과밀수용이 125%라고 하는데, 그 수치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기자님들도 와서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싱
저는 1999년 구속 수감되어 현재 26년째 복역 중인 무기수입니다. 오랜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내며, 수차례 이송을 거듭하다 보니 더 시사법률 신문 기사에서 보았던 사건속 인물들과도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가장 큰 아픔은 시간이 흐를수록 외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저를 잊고, 결국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이곳에 수감된 죄인이기에, 사회가 우리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론마저도 우리를 단순한 범죄자로만 다루고, 교도소에서의 삶이나 출소 후의 현실에 대해선 단 한 줄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더 시사법률 신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가뭄 끝 단비처럼 반갑고, 차곡차곡 쌓여만 가던 울분과 서러움 속에서도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언론과는 달리, 수형자들의 심정과 고충을 이해하려는 기사들을 보며, 이곳에 있는 많은 사람이 위로와 희망을 얻고 있습니다. 기자님들께서는 ‘뭐 이렇게까지야’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성실하게 수용 생활을 이어가며 희망을 놓지 않는 수용자들에게는 희망처럼 보였습니다. 법률 지식 하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오며 수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