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의제 추행 사건에서 합의가 되지 않은 사건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선회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번 사건은 성범죄 사건에서 피고인의 진술 태도와 사건 이후의 선택이 어떤 방식으로 재판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사건은 피의자가 랜덤 채팅 앱을 통해 만난 여성이 자신의 나이를 17세라 밝혀, 그 말을 믿고 본인도 19세라고 속이며 만남을 이어간 데서 시작됐다. 피의자는 수사 초기부터 피해자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가슴을 만진 사실에 대해서는 숨김없이 자백했다. 다만 피해자에게 폭행이나 협박 등 위력을 행사한 정황은 없다는 점을 의견서로 소명했고, 경찰 역시 CCTV 분석을 통해 강제추행의 핵심 요소인 ‘위력’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피해자의 실제 나이가 17세가 아니라 15세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의제 추행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성립한다. 더욱이 피해자의 나이에 대한 피고인의 인식 여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아니라 피해자의 외모, 상황 등 모든 요소를 종합해 판단된다. 피고인이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고등학생으로 알았지만, 중학생이라고 해도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진술한 부분은 결국 미필적 인식을 부
성범죄 사건을 다루다 보면 언제나 느끼는 점이 있다. 이 분야는 단순한 법적 판단만으로는 진실에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것이다. 사건의 특성상 당사자의 진술은 모호하고, 관계는 정형화돼 있지 않으며, 사회적 편견마저 겹쳐 사실을 왜곡하는 요소가 끝없이 달라붙는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진다. 수사기관이 그 답을 스스로 찾아주기를 기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변호인이 사건의 맥락을 해석하고 구조화해 진실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제시해야 한다. 성범죄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뒤로 수많은 의뢰인을 만났다. 하지만 법정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수사 단계에서 실체가 드러나고, 그 과정 속에서 사건이 마무리된다. 이것을 단순히 ‘합의가 됐다’거나 ‘적당히 타협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건의 구조를 처음부터 정확히 파악하고, 모순을 찾아내고, 관계의 맥락을 분석해 수사기관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불기소처분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그저 운이 좋아 혐의 없음이 나오는 경우란 없다. 성범죄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결국 ‘진술의 신빙
우리 법무법인은 꽤 오랜 시간 <더시사법률> 지면을 통해 신문 구독자님들과 만나고 있다. 어떤 코너든 글을 기고하고 나면 읽고 나서 생긴 궁금증이나 저마다의 사연을 편하게 보내주실 수 있도록 우리 사무실 주소를 덧붙여 두는데, 돌아보면 그간 많은 양의 편지를 받았다. 그런데 보내주신 편지를 읽다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각자 연루된 사건은 다르지만, 이들이 넘어지게 된 계기는 꽤 비슷하다는 것이다. 감정이 무너져 버린 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다든가, 어떤 사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궁여지책으로 회피를 선택했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든가, 또는 한 번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릇된 길로 발을 들였다든가 하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사건의 전개나 양상은 다 다르겠지만,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면 대체로 이렇다. 범죄에 이르게 하는 기제라는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곁에서 지켜본바, 이들이 다시 일어서는 방식은 저마다 모두 달랐다. 그 놀라운 변칙성은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고 다시 뿌리를 내리는 대자연의 신비와도 닮았다. 나는 구독자님들이 보내오는 편지를 종종 오래 들여다본다. 편지에는 사건 기록에서 볼 수 없는 것
형사 사건에서 피해자와의 합의는 가장 강력한 양형 요소다. 거의 모든 범죄 유형의 양형 기준에 처벌불원과 피해 회복 항목이 포함된다. 억울하게 피고인이 되어 끝까지 결백을 다투는 경우에도 만일을 대비하여 ‘도의적인 합의’ 라는 카드를 고려할 정도다. 혐의를 인정하는 사건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합의만이 최선이다. 그렇지만 합의는 ‘돈’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영역이다. 흔히 ‘합의금이 부족해서 합의가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실제 여러 합의를 진행 해 본 결과 합의금이 절대적 요인이 아닐 때가 훨씬 많다. 합의금은 일정 수준만 맞춰지면 되고, 피해자의 감정과 합의 요청 방식, 합의 시기가 더욱 중요하다. 그렇다면 합의는 어떻게 해 야 할까? 우선 어떤 사건인지 파악해야 한다. 사건의 종류에 따라 합의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기·횡령 등 단순 재산범죄의 경우에는 일정 수준의 합의금 마련이 가장 중요하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도 오로지 금전적 회복이다. 형사합의만 진행할 경우에도 피해자의 민사상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형사합의금으로 손해를 보전받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간편한(그리고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은 피해자가 더 잘
경제 범죄 수사는 감정이 아니라 숫자와 기록, 즉 객관적 자료에 달렸다. 성범죄처럼 진술의 신빙성으로 결과가 갈리는 사건과 달리, 계약서·계좌 내역·전자정보가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 초기의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찰에서 오랜 기간 수사·공판에 참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조언 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모든 거래 기록을 신속하게 확보하는 것 이다. 계좌와 카드 내역, 세금 및 계약 관련 자료, 영수증, 각종 전자 문서, 이메일·메신저 기록까지 가능한 한 모두 수집해야 한다. 원본은 안전하게 보존하고, 사본은 변호인과 함께 검토할 수 있도록 정리한다. 특히 전자정보는 삭제·편집의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이미지화해 보관해야 한다. 수정된 흔적이 발견되어 조작 의심이 생기는 순간 증거의 증명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자료 정리가 끝났다면, 사건의 흐름을 시간순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수사기관은 특정 행위가 발생한 전후의 정황을 통해 혐의를 판단하기 때문에 타임라인이 명확할수록 진술의 신빙성이 높아진다. 사건에 관여한 경위, 자금과 자료의 흐름, 각 관계자의 역할을 시간
형사사건을 오래 다루다 보면 한 가지 사실에 자주 생각이 머문다. '사람은 반드시 나쁜 마음을 품고 범행을 저질러야만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세심한 계획과 고의가 결합된 범죄도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재판정에서 실제로 마주해 온 다수의 피고인은 악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삶의 어느 지점이 미세하게 어긋났을 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을 했고, 그 작은 균열이 커다란 사건으로 이 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나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 그 이야기 속에는 수십 년 의 삶이 녹아있었겠지만 - 그 삶 을 온전히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판사의 역할은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신빙성과 진술의 일관성을 검토하고 그 결과를 법적으로 분류하는 일에 가깝다. “이 사람이 어떤 이유와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에 서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은 마음속에만 남아있었다. 재판부의 임무는 결국 사건의 ‘사정’보다는 행위의 위법성과 책임을 엄정하게 판단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은 음악 없이 업무를 보는 것이 익숙하다. 조용한 환경에서 머릿속이 정리되는 편이고, 서면을 작성하거나 기록을 검토할 때는 오롯이 글과 사안에만 집중하는 것이 편하다. 그러다 간혹 정말 바쁘거나 집중이 필요한 날이면 클래식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직원 한 명이 “메탈을 들으며 운전하면 차가 질주하듯 빨리 가는 기분이 든다”는 말을 건넸다. 처음엔 농담처럼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귀에 남았다. 나와는 거리가 먼 장르라 생각했던 메탈 음악이 어느새 플레이리스트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최근 마음에 들어 자주 듣고 있는 음악은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으로, 1991년에 발매된 유명한 곡이다. 초반에 등장하는 기타 리프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는 직원의 설명에 진짜 그런지 확인해 보려 듣게 됐다. 막상 들으니 왜 이 곡이 시대를 넘어 회자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긴장감을 끌어올리면서도, 어떤 흐름을 예고하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의외였던 점은 이 음악이 내 업무 리듬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메탈을 들으며 법정으로 향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보통 기일에 참석할
몇 달간 공백이었던 교정본부장 자리가 채워지며 일선에서 갖는 기대감이 감지된다. 교정행정에 있어 구조적인 문제로 지목되어 왔던 여러 사안들이 신임 교정본부장의 출발과 함께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교정행정에서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들 중 몇 가지는 인력난과 누적되는 현장 피로도다. 해당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보니 그동안 법무부와 교정본부에서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책들을 마련해 왔다. 그러나 그동안 실시해 온 ‘인력 진단’은 구조적 불균형을 바로잡지 못한 채 형식적 절차로만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 일선의 공통된 지적이다. 2000년대 중반, 교정본부는 비용을 들여 민간 용역기관에 인력 진단을 맡겼지만 기대와 달리 실효성 있는 개선책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천안소년교도소 내 지소인 ‘천안 구치지소’가 본소와 중복 조직을 유지한 채 인력 운영을 따로 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통합해 인원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현장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이후 수년이 지나 화성직업훈련교도소 개청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통합이 이뤄졌지만 결과적으로 다수의 인력이 한꺼번에 재배치되며 현장의 혼란만 커진 적이 있다. 대전교정청에서 진행된 인력 진단 회의
음주 운전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이미 끝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의 한 판결이 이 단순해 보이는 영역에 새로운 논점을 던졌다. 아파트 주차장에서의 음주 운전에 대해 면허취소 처분을 취소한 판결이 나온 것이다. 사건은 2023년 6월 경기도 남양주시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12%의 운전자가 지하에서 지상까지 약 150m를 이동한 데서 비롯됐다. 면허취소 기준을 크게 넘는 수치였지만, 대법원은 이 공간이 도로교통법상 ‘도로’로 보기 어렵다며 행정처분을 뒤집었다. 이런 결론이 나오자 곧바로 “그렇다면 단지 안에서는 음주 운전을 해도 단속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식의 오해가 퍼졌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아파트 주차장이 음주 운전 단속의 사각지대가 된 것처럼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판결의 핵심은 음주 운전의 위험성을 축소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공간이 법적으로 ‘도로’에 해당하는지를 엄밀하게 판단한 데 있다. 도로교통법 제2조는 ‘도로’를 “불특정 다수가 통행할 수 있는 공개된 장소”라고 정의한다. 대법원이 문제의 아파트
나에게는 만나기만 하면 끝도 없이 궁금증을 쏟아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질문은 대체로 엉뚱하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이다. “회사의 일을 외주로 넘기고 나는 월급만 받으면 범죄야?”, “로또를 같이 사면서 ‘당첨되면 반반이야’라고 했는데, 막상 내가 당첨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사기일까?” 재판 준비에 몰두하는 일상 속에서 이런 질문을 떠올릴 여유는 잘 없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는 충분히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웃어넘기던 이런 대화에 오늘은 조금 더 법률적인 시선을 얹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질문부터 보자. 회사 업무를 타인에게 외주로 맡기고 본인은 월급만 받는다면 과연 범죄가 될까? 단순 자료 정리나 반복 입력처럼 위탁이 가능한 업무라면 형사 문제까지 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회사에 알리지 않은 점이 문제 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 인사상 징계나 경고 수준에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업무 특성상 대체가 어렵고 결과물이 담당자의 역량과 직결되는 직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디자인, 설계, 개발처럼 전문성과 창의성이 핵심인 경우가 대표적이다. 회사는 직원 본인이 직접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신뢰를 전제로 급여를 지급하는데, 승인 없이 외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