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구속이 되어 감옥이라는 두렵고 낯선 환경 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썩은 동아줄도 자신을 담장 밖으로 꺼내 줄 황금 밧줄로 착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수용자들과 가족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감옥 안에서 같은 수용자들끼리 변호사를 소개하거나, 옥바라지 카페(속칭 ‘안기모’) 등에서 법 장사꾼들의 먹이가 되는 게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시사법률>신문이 생기면서 이런 부조리들이 사라져 가는 시발점이 되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옥바라지 카페가 가족들을 이용해 특정 변호사를 선임하도록 유도하는 행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모든 수용자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제 많은 수용자들이 이 구조의 실체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만약 가족이 아무것도 모른 채 옥바라지 카페를 통해 변호사를 선임하려 한다면, 우리 수용자들이 단호하게 거부해야만 이와 같은 부조리가 사라지고 본래의 가족 소통 공간으로 바뀔 거라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감옥 안에 있는 저희는 신문을 통해 올바른 정보를 습득하고 있지만, 정작 바깥의 가족들은 인터넷 검색을 하면 보다 ‘안기모’ 같은 옥바라지 카페가 더 잘 노출되고, 접근하기 쉬운 탓에 이들이 제공하는 거짓
오직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길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러, 60대의 노년을 교도소 안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벌써 7년이 흘러 이곳에서 여덟 번째 여름을 맞으며, 이제는 그동안 보고 느낀 교정 현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교도소의 목적은 단순한 처벌이 아닌, 수형자들이 사회에 다시 나갔을 때 재범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교화’와 ‘교정’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 이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실제로 교도소에서는 초범과 재범, 사기범과 강력범이 구분 없이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20대와 60대가, 경미한 범죄자와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한 공간에 머무는 이 구조는 자칫 잘못하면 ‘범죄의 재생산’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를 교정 당국도 인식하고 있으며, 인성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수형자들의 변화를 돕고 있습니다. 저 역시 70시간의 인성 교육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교정행정이 변화와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여전히 과밀 수용 문제 등으로 인해 교육 효과가 제한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강사의 전문성 부족, 교육 방식의 획일성, 수강생의 참
늙어가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후회하는 일들이 참 많았지만, 문득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본다. 누구나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는 없겠지만적어도 작은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 꿈이 있었는지?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억이 없다. 기억이 존재하지 않으니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참 많이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머릿속 기억은 좋았던 그때에 머물러 있는데,지금의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고, 한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정말 부끄럽다. 이곳을 떠나 세상 속으로 나가게 되면남은 인생은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싶다. 비록 조금씩 늙어가고 있지만,그다음에는 ‘그래도 참 잘 살았구나’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후회 없이 살고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은 구속된 인생을 살고 있지만,이후의 인생은 절대로지금 이 순간의 후회를 잊지 말고 살아가자. 비겁한 인생은 여기까지만.변명은 이제 하지 말자.모든 것은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 정해진 운명의 길을 걷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 수많은 길은 서로 만나는 시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인생의 교차로’이죠. 처음에는 다들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그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필연의 시점은 왜 찾아오는 것일까요?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꼭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깨달을 때, 우리는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배움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각자의 갈림길에서 헤어지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경험은 ‘선물’입니다. 다만,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가 ‘받고 싶은 선물’과 ‘받기 싫은 선물’이라는 구별을 낳을 뿐, 가치 없는 경험은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것이 선물이었음을 깨달을 지혜를 하느님께, 부처님께, 예수님께, 조상님께, 선생님께, 어른들께 구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재판이라는 길에서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참회하고, 무엇을 얻어갈지는 잘 모르겠지만,신께서 우리 모두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시길 소망합니다. 구치소, 교도소라는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우리 모두! 만난 김에 허심탄회하게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 시원하게 털어놓고
어릴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땐 몰랐다. 내가 교도소란 곳에 들어와 살게 될 거란 걸. 16세에 처음 비행을 저질러 가게 되었던 소년분류심사원… 한 달 동안 참 많이 울었다.이때 정신을 차리고 잘 살았어야 했다. 한 달간의 소년분류심사원 생활로 겪은 후유증도 잠시…세 달 안에 다시 죄를 지어 이번에는 구속 수감이 되었다. 소년분류심사원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교도소라는 곳.불과 17세였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반성을 하며 지내다 보니 판사님께서 소년부 송치라는 판결을 내려주셨고, 또 소년분류심사원에 가게 되었다. 처음이 아니었던 터라 전보다는 생활하기 수월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집에 갈 줄 알았던 나에게 판사님이 내려주신 처분은 소년부 최고 처분인 10호(소년원 2년) 처분이었다. 한 달도 힘들기만 한데, 이젠 2년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죽고만 싶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보자 다짐하고, 후회의 나날을 보내다 보니 사회 복귀의 시간이 찾아왔다. 내 아까운 청춘에 보답하듯 열심히 살자며 다짐을 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내 다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세 달 안에 구속이 되어 교도소
10년 전 부모님이 트럭으로 자영업을 시작했다. 열심히 달리던 녀석은 올해 들어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해, 어느덧 앞에 달린 수리비만 1,000만 원 가까이 됐다. 여기에 트럭 할부금과 기름값, 생활비까지 매달 나가야 할 돈이 쌓여 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은 몇 날 며칠 끙끙 앓다가 나와 누나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빠듯한 적이 없었는데… 다음 달에 쓸 돈이 부족해 대출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아버지는 이보다 더한 일도 수없이 겪어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며 웃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부모님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다 내 통장이 떠올랐다. 많지 않은 돈이지만 매달 차곡차곡 모은 주택청약예금과 자율 적금이었다. 그 돈이면 당장 수리비와 생활비 정도는 충당할 수 있었다. 적금을 깨자는 내 말에 부모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막내아들이 꼬박꼬박 모은 돈을 쓴다는 게 편치 않은 것이다. 주저하는 부모님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이럴 때 쓰려고 모아 둔 거지. 대출 갚겠다고 대출을 또 받으면 더 고생이잖아. 더 빌리지 말고 내 돈 써.” 부모님은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하셨다.
“자녀들은 때로 부모가 자식들을 아끼는 것보다 부모를 더욱 사랑한다.” 오래전에 아동심리 전문가에게서 들은 얘기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구치소라는 낯선 환경에 들어오기 전에 평범한 사회인으로, 또 한 가정의 아버지로 지냈을 때, 가끔가다 어린 두 아들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지을 때면 그 얘기가 종종 떠오르곤 했습니다. 작년에 다른 구치소에서 지낼 때 ‘가족 만남의 집 접견’을 했습니다. ‘장소 외 접견’이라고 불리는데, 접견 시간이 더 길고 가정의 거실 같은 분위기로 꾸며진 방에서 만나 손도 잡고 포옹도 할 수 있는 보다 따뜻한 접견 방식입니다. 몇십 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곧 헤어질 시간이 되어 아쉬움이 묻어나는 포옹을 하며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습니다. 접견하는 내내 두 아들과 저는 명랑한 표정과 말투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중학교 1학년이 된 두 아들과 아내는 집으로 돌아갔고, 며칠 후 아내와 통화를 했습니다. 예상 밖에 아내가 한 말이 저의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차 안에서 울었고 또 집에 도착해서도 펑펑 울었다고 했습니다. 접견할 때 저에게 궁금한 표정으로, 제가 입
엄마, 하고 마음을 담아 목청껏 불러봅니다.엄마, 제 목소리 지금 들리시나요. 유행가처럼 늘 부르던 엄마. 배고플 때 밥 달라고 “엄마”하고 부르고학교 갈 때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집에 오면 “엄마, 다녀왔습니다”내가 아쉬울 때 애교 부리면서 “엄마” 60년을 넘게 입에 달고 부르던 나의 노래 “엄마”지금은 부를 수가 없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지요. 내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는 태내에서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언어를 배웠고,세상의 빛을 보면서는 엄마는 나에게 젖가슴을 내밀어 초유를 주시며,엄마와 나의 첫 인연을 가족의 끈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엄마가 숨을 쉬면 내가 숨 쉬는 것이고,엄마가 웃고 있으면 내가 웃고 있고...그런데 왜 엄마의 아픔과 슬픔은 대신하지 못할까? 참 아쉽다. 이제는 우리 엄마가 늙어가는 모습만 바라보면서 수많은 기억들을 돌이켜봅니다. 엄마에 대한 감사, 사랑, 배려 이런 단어들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는 못할 것입니다.이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지나면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른 뒤에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영원히 길이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엄마의 은
미움과 귀여움의 차이 아무 데서나 방귀 뀌기, 반찬 많이 먹기, 화장실 나오면서 슬리퍼 아무 데나 벗어 던지기, 3옥타브로 코 골기 등등. 같이 지내는 어떤 인간의 만행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디서 이런 인간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내 수명을 갉아먹는 건지, 하… 그래 이것이 감옥이지, 이 또한 치러야 할 내 죗값에 패키지로 포함된 것이라 여기며 매일을 정신승리 갱신을 하던 10여 년 전이 떠오른다. 사람이 싫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밉게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은 매 순간 인상을 쓰고 다니는 그 사람의 면상이었다. 저 양반 왜 저래? 뭘 잘했다고 저렇게 인상을 구기고 다녀? 쎄보이려고 저러나? 별생각 다하며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커져 갈 무렵, 어느 날 접견장 대기실에서 그 인간과 딱 마주친 것이다. 서로가 비호감임을 인지해 온 시간의 무게만큼 대기실의 적막감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000번, 스마트 2호 접견실로 들어가세요.” 구세주 같은 직원의 방송이 나오자, 그 사람이 먼저 접견실로 향했다. 잠시 후, “하하하, 우웅~ 구래구래~ 우리 딸내미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맛있쪘져?” 접견실 문 너머로 그 사람의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 교도소, 구치소에서 자유가 제한된 힘든 생활을 보냅니다. 지난번 <더시사법률>에 투고했던 투고자님의 말씀처럼 구치소든 교도소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돈(영치금)이 없으면 ‘법자’(법무부 자식)라는 은어로 불리며 거실 내 소일거리를 맡아서 하거나 식기 당번제, 화장실 청소와 같이 번갈아 가며 해야 될 일도 도맡아 하게 되는 경우가, 저의 주관으로는 거의 모든 교정시설이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필자인 저도 ‘법자’입니다. 미결수를 지내는 동안 영치금이 없고 접견 오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거실을 쓸고 닦고, 화장실 청소, 설거지, 식수 받기, 구매지 작성을 다 했습니다. 20시 30분에 모포를 깔면 그대로 잠들었고, 오전 5시 30분이 기상 시간이었습니다. 영치금이 어느 정도 있어야 징역 생활이 편하다는 것에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 같은 경우 괴롭힘이 심해서, 주로 괴롭힘을 주도했던 인원이 전방을 가고도 쓰리쿠션(타교도소에 편지를 적어 원하는 교도소로 편지를 보내는 행위)으로 저를 괴롭히라고 하는 정도까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어차피 이런 일로 면담을 해봐야 좁은 징역에서 코걸이라며 더욱이 사람 취급을 못 받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