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회에선 그를 로열이라고 불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에서 태어났지만 고급 저택에서 살았고 러시아 모스크바와 스위스 제네바로 유학도 했다. 그가 로열패밀리가 될 수 있었던 건 여배우였던 이모 덕분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이한영. 이한영의 이모부가 바로 북한의 김정일이다. 이한영은 여배우였던 이모 성혜림이 김정일의 눈에 들면서 김정일의 일가가 되었다. 이한영 가족은 김정일 관저 근처의 저택에 살며 김정일과 최소 주 2회 이상 겸상을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이한영의 이모 성혜림과 김정일 사이에 장남 김정남이 태어났고, 이한영은 김정남의 유일한 사촌 형으로 그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300평의 대저택에 초호화 유학 생활까지 모든 것을 누리고 있던 그가 가질 수 없던 것은 단 하나, 자유였다. 청년 이한영은 미국을 여행하고 싶었다. 이한영은 1982년 9월 28일 제네바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김영철’이라는 북한 외교관으로 소개하며 미국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당시 스위스 대사관과 긴밀한 협조를 하고 있던 안기부는 그가 북한에 대한 중요한 정보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한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단 사흘 만에 이한영은 한국으로 들어왔다. 망명이었다. 그의 망명 이유로 자유를 갈망했던 청년의 우발적 결정으로 알려졌지만, 북한의 엘리트 기자 출신이었던 탈북인 김길선은 그가 처음부터 탈북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한영’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안기부가 지어준 이름이다. 신변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망명 사실도 비밀에 부쳤다. 이한영이 북한에서 사용한 본명은 리일남, 해외에서 외교관으로 위장해 사용하던 이름은 김영철이었다.
한국에서 영원히 살라는 뜻을 이름으로 받은 이한영은 신분세탁을 위해 성형수술을 하고 안기부 특채로 KBS PD라는 새 직업도 생겼다. 이한영은 우리나라의 일을 러시아어로 전 세계에 방송하는 국제국 러시이아어 방송 PD로 살며 한국의 여성과 결혼하고 딸도 낳았다. 1990년엔 KBS를 퇴사한 후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익숙하게 살았던 북한 사회와 달리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사회는 생각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사업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하더니 횡령 혐의로 10개월간 옥살이도 하게 되었고, 이후 다양한 사업에 도전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거기에 안기부의 지원까지 종료되자 이한영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절박해진 그는 언론사에 찾아가 자신의 존재를 폭로해버린다. 망명 13년 만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이한영은 모친 성혜랑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고, 모친의 제3국 망명이 성공하자 1996년 6월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란 책을 펴내기에 이른다. 그의 책에는 ‘기쁨조의 모든 것’, ‘모스크바의 밤과 로열패밀리’ 등의 소제목으로 김정은 일가와 고위 간부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담겨있었다. 이한영의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김정일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를 이어갔다. 폭로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신분이 노출된 이한영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한영은 즉시 활동을 접고 전화번호도 바꿨다. 경상도 사투리도 배워 신분 위장에 활용했다.
1997년 2월, 초콜릿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며 성남 분당의 대학 선배의 집에 잠시 얹혀살던 이한영은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2월 15일, 선배의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모 잡지사의 기자가 이한영과의 인터뷰를 이유로 그의 귀가 시간을 물었다. 전화를 받은 선배의 아내는 기자라는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게 된다. 그러나 잡지사 기자라던 사람은 암살조였다. 북한 공작원 2명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기 시킨 뒤 아파트로 올라가 이한영의 퇴근을 기다렸다. 밤 9시 45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한영은 현관문 앞에서 공작원과 마주치고 강렬히 저항했지만 그들이 쏜 총알은 이한영의 이마에 명중했다. 바깥 소란에 인터폰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옆집이 급히 신고했고, 119 구조대에 실려 간 이한영은 뇌사상태로 열흘을 더 살다가 2월 25일, 향년 36세의 나이로 숨졌다.
이한영 암살조는 고속도로를 타고 남해안으로 내려갔다가 북한 잠수함을 타고 북한으로 복귀했다. 북한에 돌아간 그들은 영웅 칭호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벌어진 북한의 고위인사 암살사건은 이한영이 유일하다. 국외에서 암살당한 유일한 인물은 그의 사촌 형인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다. 김정남은 이한영 사망 20년 뒤,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독극물 테러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