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규의 수사반장 (12화) 형사 J 가 잊지 못하는 불쌍한 보험살인 피해자

칼 든 범인을 제압하던 새내기 형사
조직폭력배, 보험사기 전문 형사로
고아였던 피해자를 노린 보험살인
범인 검거 후 영혼 위로하는 제사도

 

경기도 성남시 수정경찰서 강력반에서 형사 생활을 시작해 어느덧 30년 차 베테랑이 된 형사 J는 90년대 막내 형사 생활을 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눈앞에 있던 살인범에게 칼부림을 당했던 기억 때문이다.
사건의 시작은 성남시 종합시장 인근의 한 허름한 모텔에서 시작됐다.

 

당시 감식 교육을 받기 위해 경찰중앙학교에 있던 형사 J는 반장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형사 J가 마주한 현장은 처참했다. 모텔방 한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칼로 38군데를 찔린 시신에서 흐른 피가 방바닥을 넘어 신발장까지 적시고 있었다.


살인의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해당 모텔은 단순한 숙박업소가 아니었다. 불법 도박장을 함께 운영하던 이곳에서 판돈을 잃어버린 도박꾼이 모텔 주인에게 돈을 꾸려다가 주인이 거절하자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했던 것이다. 막내 형사였던 형사 J는 팀원들과 함께 범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추적 끝에 형사들은 살인범이 의정부의 한 지인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사팀 전원은 곧바로 의정부로 향했다. 검거작전을 앞둔 형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살인범이 칼을 들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형사들이 들이닥친다면 그는 칼을 휘두를 게 뻔했다.

 

 

결국 형사팀의 막내이자 미혼이었던 형사 J가 스스로 앞장서기로 했다. 그는 선배들에게 자기가 직접 범인을 잡아 오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지만,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울려댔다. 형사 J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권총과 고무탄총의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살인범이 은신하고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형사 J는 깊은숨을 한번 몰아쉬고 지하실 문고리를 돌렸다. 그 순간, 날렵한 그림자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살인범이었다. 형사 J는 본능적으로 살인범을 잡아 업어치기를 하고 권총 손잡이로 머리를 가격했다. 살인범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살인범과 격투를 벌이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단 한 가지, 범인과 격투를 벌이던 중간 옷이 헐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형사 J는 그 순간 본인이 칼에 찔렸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형사 J는 선배들에게 선언한 대로 범인의 손에 수갑을 채워 밖으로 나왔다. 선배 형사들은 그런 형사 J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새내기 형사가 범인을 홀로 제압해 검거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당시 그가 입고 있던 두툼한 가죽점퍼가 칼날에 찢겨 너덜너덜해진 것이었다.

 

 

비싼 점퍼가 다 찢어졌을 뿐 형사 J는 복부에 가벼운 생채기가 생긴 것이 상처의 전부였다. 그날은 형사 J의 잊지 못할 하루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위기일발이었던 당시의 순간보다 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형사 J에게는 있었다.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오는, 그의 명복을 위해 제사까지 지내주었던 그 사건이었다.


때는 2008년, 형사 J가 경기남부경찰청 강력반에 근무하면서 조폭 전문 형사로 활약할 때였다. 조직폭력배들이 활개를 치던 시기라 형사 J는 몇백 명의 조직폭력배를 한 번에 검거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남시에서 조폭이 보험사기에 개입한 사건이 터졌다.

 

다시 경찰 내부에는 보험사기 전담 부서조차 없었고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형사 J는 강력반 형사로 쌓아온 노하우로 보험사기 사건을 해결해 나갔고 조폭 소탕 전문가였던 형사 J는 보험사기 전문 형사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의 형사 인생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도 바로 보험사기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사건은 2008년 평택시에서 발생한 한 건의 교통사고였다. 피해자는 정신지체 장애가 있던 A 씨(남성, 30대 초반)였다. 그는 고아로 자라 가족 없이 살아가고 있었고 평택시의 인력사무소에 고용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6년 9월경부터는 월 32만 원 상당의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2008년 A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인력사무소의 대표가 약 9억 3천만 원의 보험금을 보험사에 청구하였다. 고아였던 A 씨가 보험금 수령인으로 인력사무소의 대표를 지정해 두었던 것이다.

 

이에 보험사는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형사 J에게 문의를 해왔다. 형사 J는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글씨라고는 글자를 그려 따라 쓰는 수준이었던 A 씨가 인력사무소의 직원으로 고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조사를 진행할수록 더욱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밝혀졌다. 보험 수령인으로 지정되었던 인력사무소 대표가 실은 평택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직폭력배였던 것이었다.

 


형사 J는 피의자가 고아에다 정신지체 장애가 있던 A 씨를 일부러 고용하고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한 살해를 저질렀을 것으로 예상했다. 형사 J는 이 사건을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닌, 보험금을 노린 살인사건으로 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형사 J가 알아본 A 씨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다. 3살 때 양친이 사망하면서 정신지체가 있던 그를 돌봐줄 사람이 사라졌고, 연이어 불우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구마 농장에서 잡일을 시작했는데 그 농장에서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고, 그는 영영 글을 읽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30대의 나이였던 A 씨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던 이유였다.


형사 J는 먼저 보험사에 보험금 지급정지를 요청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증거였다. 하지만 A 씨의 장례가 이미 치러진 상황이어서 시신을 부검할 수도 없었다. 경찰이 확보한 유일한 단서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119 구급대가 찍은 단 세 장의 사진뿐이었다.

 

형사 J는 그 세 장의 사진만으로 보험사기 살인사건을 밝혀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부검 없이 타살이라는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고심 끝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오래전 학회에서 만났던 법의학 교수였다. 형사 J는 곧바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건 상황을 전해 들은 법의학 교수는 교통사고 현장 사진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을 거라며 형사 J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형사 J는 서둘러 사진을 들고 법의학 교수를 찾았다.


사진을 받아 든 교수는 사진에 찍힌 현장은 위장된 교통사고 현장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살인사건을 누군가 사고사로 위장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용의자들이 보험금을 수령하기 위해 A 씨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거란 형사 J의 예상이 보다 진실에 가까워졌다.

 

더구나 가족이 없는 고아들이 보험 살인의 대상이 됐던 경우가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법정상속인이 없어 수령인으로 지정된 누군가가 돈을 다 가져갈 수 있었고, 유족이 없으니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A 씨 역시 이 악랄한 범죄의 희생자가 됐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형사 J가 이 사건의 담당자였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피의자를 검거하는 일이었다.


형사 J는 본격적으로 범인들에 대한 수사에 돌입했다. 철저한 조사와 자료 분석 끝에 피의자들을 한 명씩 불러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거부할 수도 없고, 변명할 수도 없이 형사 J가 들이미는 증거는 강력했다. 결국 범인들은 범행을 인정하고 자백을 시작했다. 그들이 자백한 모든 범행 과정이 형사 J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범인들은 A 씨를 보험에 가입시키기 위해 치밀한 방법을 썼다. A 씨가 글씨를 쓸 줄 모른다는 점을 미리 알고 서류에 필요한 글자를 미리 써서 보여준 다음, A 씨가 그 글씨를 마치 그림을 따라 그리듯 그리게 하여 서류 완성했다. 그렇게 거액의 보험금이 걸린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2008년 4월 저녁 8시경, 어둠이 낮게 깔리자 범인들은 평택시 안중읍의 한 농장 근처 공터에서 A 씨를 불러 술을 잔뜩 먹였다. A 씨는 점점 몸을 가누지 못했고 완전히 만취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를 이용해 A 씨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였다.


형사 J는 범인들의 자백 이후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형사 J와 수사팀이 조직폭력배였던 범인들을 현장에 데리고 갔고, 그들이 현장의 공기를 직접 마주한 순간,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던 조직폭력배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물은 곧 통곡으로 변했다. 보험금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질렀지만, 불쌍하고 가여운 피해자에 대한 일말의 죄의식이 그들에게도 남아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뒤늦게 통곡을 하며 용서를 빈다 한들, 이미 세상을 떠난 A 씨가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형사 J는 마음이 무거웠다. 보험사기 살인이라는 범죄도 밝혀냈고 범인들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형사 J에게는 무언가 마무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A 씨의 존재가 자꾸만 마음 한편을 무겁게 짓눌렀다. 형사 J는 고민 끝에 A 씨를 위한 제사를 지내주기로 했다. 고아로 자라 평생 외롭게 살다가 끝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A 씨였다. 수사팀은 조용히 북어포에 소주 한 잔을 올렸다. 냉철한 형사였지만 이 불쌍한 영혼에 술 한잔을 올리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그로부터 벌써 긴 세월이 흘렀지만, 가끔 소주 한 잔을 기울일 때마다 그때의 사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