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규의 수사반장 (11화) 진주 덕진 경찰서 강력 3팀이 해결한 고준희 양 사건 (2)

군산에서의 수상한 행적 발견
주인공 없는 생일잔치도 열어
결국 자백을 이끌어 낸 수사팀
학대에서 방치, 사체 유기까지

 

진주 덕진경찰서 강력3팀은 고준희 양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친부 A 씨, 그의 동거녀 B 씨, B 씨의 어머니 C 씨의 통화내역을 샅샅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수사팀의 눈길을 끄는 두 가지 통화가 발견됐다.


첫 번째는 이들이 2017년 4월 29일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 B 씨가 하동의 한 펜션에 걸었던 예약전화였다. 수사팀은 해당 펜션에 연락해 예약장부를 확인했다.

 

이날 B 씨가 예약한 인원은 어른 셋, 아이 하나. 그러나 단 두 시간 뒤에 같은 펜션으로 C 씨가 전화를 걸어 어른 셋, 아이 둘로 예약 인원을 변경했다. 강력 3팀의 P 팀장과 강력반 L 형사는 예약 인원 변경에 주목했다. 어쩌면 처음에는 고준희 양을 깜빡 잊고 빼놓았다가 다시 예약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형사는 실제로 당시 고준희 양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통화 기록이 있었다. 4월 27일 깊은 밤이었던 02시 22분경 A 씨와 C 씨가 짧은 통화를 했다. 단순한 안부였다고 해도 늦은 시간에 통화를 한 것이 수상했다. 하지만 더 수상했던 건 기지국의 위치였다. 두 사람이 전화통화를 했던 장소가 A 씨가 살던 전북 완주나 C 씨의 거주지였던 전북 전주가 아닌 엉뚱하게도 전북 군산이었다. 기지국의 위치는 달랐어도 그 시각에 두 사람 모두 군산에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강력 3팀은 그날 새벽 고준희 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제보들이 수사팀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덕진경찰서 형사들은 직접 펜션 주인을 만나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가 여행 성수기여서 펜션 주인은 A 씨 일행을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최면수사까지 실시하게 됐고, 펜션 주인은 A 씨 일행과 같이 온 어린아이를 여자아이라고 기억해냈다. 한편, 공개수사 이후 2017년 7월과 8월에 고준희 양을 보았다는 제보도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강력 3팀 형사들은 A 씨 일행을 의심하면서도 진범의 흔적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를 자신들의 수사를 의심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A 씨 가족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달리 있을 수 있는 진범의 범행을 놓칠 수도 있다고 본 것이었다. 더구나 탐문을 거듭하던 수사팀은 B 씨가 7월 22일 고준희 양의 생일을 맞아 하루 전 아파트로 이웃을 초청해 미역국을 대접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웃들은 그 미역국이 고준희 양의 생일 미역국이었다고 말했다. B 씨의 어머니 C 씨가 미역국을 대량으로 끓여 집으로 가져 왔다는 것이었다. 또 A 씨가 7월 21일에 제과점에 들러 고준희 양의 생일 케이크를 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수사팀은 내부회의를 거듭했다. 많은 제보가 있었지만 고준희 양을 확실하게 본 목격자는 단 한 명, 어린이집 교사가 전부였다. 3월 31일에 어린이집 교사를 만난 이후의 행적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A 씨의 행적에는 그의 진술과는 다른 정황들이 상당 부분 밝혀졌다.


특히 수사팀은 4월 27일 새벽에 A 씨와 C 씨가 함께 군산에 있었단 사실에 주목했다. 군산에는 A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가 있었다. 수사팀은 당시 A 씨가 전화를 건 기지국 인근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 도착한 강력3팀의 P 팀장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곳은 주변에 가로등도 없고 인적 없이 어두운 곳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암매장도 가능할 법한 장소였다. 강력3팀은 다른 강력팀과 협력해 A, B, C 씨 세 사람을 동시에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C 씨는 남아 있는 B 씨의 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조사를 거부했다. 결국 A 씨와 B 씨의 경찰 조사만 이뤄졌다. A 씨의 조사는 강력 3팀의 P 팀장과 L 형사가 맡았다.


A 씨의 조사를 앞두고 두 사람은 작전계획을 세웠다. 11월 18일부터 시작해 과거를 되짚으며 A 씨를 서서히 옥죄자는 전략이었다. A 씨가 스스로 흔들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A 씨가 허점을 보이고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때 ‘4월 27일’의 카드를 던지기로 했다. 두 형사는 A 씨가 고준희 양을 마지막으로 봤다던 11월 18일의 일정부터 파고들었다.

 

수사팀은 그동안의 증거수집을 통해 이 사건의 수상한 정황들을 하나둘씩 이미 모아둔 상태였다. 특히 C 씨의 집에서 발견된 고준희 양의 칫솔이나 물건에는 고준희 양의 DNA가 발견되지 않았다. 또 A 씨의 증언과 CCTV에 남겨진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형사들이 이런 의혹들을 계속해서 캐묻자 A 씨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드디어 7월, 수사팀은 고준희 양의 생일로 시간을 되돌렸다. A 씨는 이전 조사에서 고준희 양의 생일 전날인 7월 21일에 생일 케이크를 샀고 7월 22일에 B 씨와 함께 C 씨의 집을 방문했다고 진술을 바꿨다. 하지만 이날 조사에서 A 씨는 돌연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케익을 고준희 양의 생일 전날, 혹은 전전날쯤 시내에서 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제는 자신이 아닌 B 씨가 본인의 신용카드로 했다고 진술하였다.

 


두 형사는 확신했다. A 씨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수사팀이 확보한 카드 사용 내역과 생활반응 기록을 보면 A 씨는 고준희 양의 생일이 있던 7월 22일 전후로 그의 거주지에서 고준희 양이 살고 있던 전주로 내려왔던 적이 없었다. 그때 베테랑 L 형사가 나직하게 물었다.


“준희가 아직 살아 있나요?”
A 씨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L 형사가 다시 물었다.
“준희는 지금 어디 있나요?”


역시 A 씨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 팀장은 종이와 펜을 꺼내 A 씨 앞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보라 권했다. A 씨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형사들만 바라보다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저 믿습니까?’
형사들은 A 씨를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자백이 시작됐다.


4월 26일 아침 A 씨는 기침을 심하게 하는 고준희 양을 C 씨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A 씨가 C 씨 집에 갔더니 고준희 양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인공호흡을 했지만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A 씨가 자백했다는 말이 전해지자 B 씨 역시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 A 씨를 조사한지 6시간 만에 얻어낸 자백이었다.


12월 28일 밤 11시 강력3팀과 A 씨, 그리고 덕진경찰서 수사과장, 형사계장, 전북청 과학수사팀이 암매장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리고 12월 29일 새벽 4시 50분경 경찰은 암매장한 고준희 양의 사체를 찾아냈다. 이불에 감싸인 사체는 이미 미라처럼 변한 모습이었다. 고준희 양의 사체는 국과수로 옮겨져 부검에 들어갔고 12월 31일 부검 결과가 나왔다. 양쪽 갈비뼈 3개가 골절된 것으로 보인다는 결과였다.

 


한편 덕진경찰서 강력3팀은 A 씨, B 씨, C 씨에 대한 조사를 계속 이어갔다. 고준희 양의 죽음이 단순한 방치가 아닌 지속적인 학대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었다. B 씨의 자백을 통해 A 씨가 평소 고준희 양을 폭행해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갑상선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지 않은 지도 한참이었다. 더 끔찍한 사실은 고준희 양이 사망 전 A 씨에게 발목이 밟혔고 고름이 흘러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준희 양은 허약해진 몸 상태로 지내다 대상포진까지 걸린 상태였다. A 씨와 B 씨는 고준희 양을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사망할 때까지 방치하기를 택했다. 아동학대로 처벌 받는 것이 두려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준희 양의 양육수당을 부정 수령해오기까지 했다.

 


수사팀은 A 씨와 B 씨를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지속적인 학대 및 방치), 사체유기(고준희 양 사망 후 암매장),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고준희 양이 살아있는 것처럼 속임), 사회보장급여의 이용 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위반(양육수당 부정 수령) 혐의로, B 씨의 친모 C 씨를 사체유기와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 이제는 법정에서 그들이 저지른 죗값을 치를 시간이었다.


강력3팀의 P 팀장과 L 형사는 이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며 서로에게 말했다. 12월 27일부터 12월 29일까지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군산의 암매장 현장을 가고, A 씨를 신문하고, A 씨의 마음을 돌리게 해 6시간 만에 자백을 받고, 다시 군산 암매장 현장을 가야했던 일정이었다.

 

그 과정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고생보다 더욱 힘들었던 건 따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한 집안의 가정이었고 아이를 둔 아버지였다. 그들은 부모의 손에 학대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뒤 차가운 땅 속에 버려진 고준희 양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 세상에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