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경험이 풍부한 50대 법관들의 이탈이 고착화되면서 법원이 이들의 축적된 역량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으로 ‘시니어 판사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정년을 넘긴 판사가 재판 업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숙련 인력 공백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다.
23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법원을 떠난 판사는 총 433명으로 나타났다. 연도별로는 2021년 91명, 2022년 88명, 2023년 80명, 2024년 94명, 올해 현재까지 80명에 이른다. 이 중 상당수가 정년인 만 65세보다 한참 이른 50대 초반에 법관직을 내려놓은 중견 판사들이다. 퇴직자 평균 연령은 51.4세, 평균 근무 연수는 19년이었다.
이들 중견판사들이 법원을 떠나는 주요 이유로는 로펌 이직이 꼽힌다. 법원 경력 20년 안팎의 판사들은 대형 로펌의 주요 영입 대상이다. 법무법인 청 곽준호 대표변호사는 이날 <더 시사법률>에 “50대 초반은 경력도 상당히 쌓였고 정년도 충분해 가장 좋은 조건으로 로펌에 이직할 수 있는 시기”라며 현직을 떠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제는 실무의 중심에 선 판사들이 무더기로 법원을 등지면서, 재판의 질과 효율에 장기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직업법관제는 배석판사부터 수십 년간 재판 경험을 쌓는 구조이기에, 한 명의 베테랑 법관이 빠지는 것은 단순한 인원 손실이 아니라 숙련 역량 전체의 손실을 의미한다.
법관 이탈을 막기 위해 보수 체계를 개선하자는 제안도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크다. 검사와 공무원 보수를 동결한 상황에서 판사 보수만을 별도로 인상하기는 어렵고, 국민적 수용성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대신 꺼내든 카드는 시니어 판사제다. 일정 경력 이상 법관을 선발해 정년 후에도 70~75세까지 재판 업무를 맡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경륜 있는 판사의 재직을 연장해 숙련 인력의 단절을 막는 방식이다.
시니어 판사제는 지난달 열린 대법원장 자문기구인 사법정책자문위원회 회의에서 본격 논의됐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 제도 도입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으며, 자문위는 제도화 필요성에 공감하고 조 대법원장에게 관련 건의를 전달했다.
회의에선 시니어 판사가 단순 민사사건 등에만 한정돼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경륜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재판에 참여시켜야 실효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신임 판사 임용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니어 판사를 정원 외로 운용하자는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됐다.
보수 체계는 재판 업무 축소에 따라 일정 부분 감액하되, 과도한 축소는 유인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연금과의 연계성까지 고려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자격 요건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이상 법관으로 재직한 경력이 있는 자로 한정하는 방향이 검토되고 있다.
곽준호 변호사는 “수십 년 경력의 시니어 판사가 재판에 참여하면 법원이 외부 영향을 덜 받는다는 신뢰를 주고, 동시에 젊은 판사들의 업무 부담도 줄일 수 있다”며 “재판 보조인력 강화를 통한 업무 분산 등을 통해 판사 업무 과부하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