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우리 사회 ‘미투 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던 모 기업 내 성폭행 사건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당시 피해자의 변호인으로서 가해자의 범행을 입증하고 1심에서 징역형이라는 유죄 판결을 끌어내는 데 조력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9. 9. 5 선고 2018고합875 판결 참조).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정의를 바로 세웠다는 생각에 변호사로서 큰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변호사로서 또 다른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성범죄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가해자’라는 낙인 뒤에 가려진 억울한 피의자, 피고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성범죄는 그 특성상 물증이 부족하고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직접 증거인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피의자나 피고인은 제대로 된 방어권 한번 행사하지 못한 채 사회적, 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변호사의 사명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변호사는 무조건 의뢰인을 옹호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실의 편’에서 법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억울한 피고인은 무죄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싸워야 하며,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피고인은 합당한 처벌과 함께 재기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변호사의 역할이라고 믿게 되었다.
법원은 성범죄 사건 심리 시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하여 피해자가 처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피해자가 왜 즉시 신고하지 못했는지, 왜 가해자와 다시 연락했는지 등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인지적 관점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무력화하거나 유죄의 무조건적인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법원은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하더라도 피해자 진술 내용 자체의 합리성, 객관적 정황 등에 비추어 증명력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며,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하다는 확신이 없다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명확히 하고 있다(서울고등법원 2024. 7. 11. 선고 2024노1155 판결).
즉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일 경우, 그 진술의 진실성과 정확성에 거의 의심을 품을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증명력이 요구되며 이러한 증명력이 부족하다면 무죄가 선고되어야 한다(광주고등법원(전주) 2023. 3. 8 선고 2022노200 판결).
나는 이러한 법리에 기초해 피고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건에서는 피해자 진술의 사소한 모순점이나 비합리성, 객관적 증거와의 불일치 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진술의 신빙성을 탄핵하고, 이를 통해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는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형사법의 대원칙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반면, 자신의 잘못을 명백히 인정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피고인도 있다. 이런 경우 변호사의 역할은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피해자 대리를 맡았던 성범죄 사건의 항소심에서는 1심에서 실형을 받았던 피고인이 항소심에 이르러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와 합의하자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바 있다.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실질적 피해 보상을 하는 과정은 피고인에게는 사회에 복귀할 기회를 주는 ‘회복적 사법’의 의미를 가진다.
나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양측 모두 상처를 최소화하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조력해 왔다. 피해자 대리와 피고인 변호. 언뜻 보면 양립할 수 없는 두 길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역할이 결국 ‘실체적 진실 발견’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변호사의 사명은 의뢰인이 누구이든 그가 처한 상황 속에서 법이 허용하는 최선의 결과를 얻도록 돕는 것이며 그 과정은 언제나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억울한 피고인에게는 무죄라는 정의를, 진정으로 반성하는 피고인에게는 용서와 재기의 기회를 찾아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형사 전문 변호사의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