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의 로마자 성명을 개인적 선호만을 이유로 변경해 달라는 신청은 허용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여권의 대외 신뢰도와 출입국 관리상 동일성 식별 필요성을 고려할 때 법령이 정한 사유에 해당해야만 변경이 가능하다는 취지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부장판사 이상덕)는 여권의 영문 성 표기를 ‘LEE’에서 ‘YI’로 변경해 달라며 이모씨가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여권 영문명 변경 거부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씨는 최초 여권 발급 당시 영문 성을 ‘LEE’로 표기해 여권을 발급받았고, 이후 재발급 과정에서도 동일한 표기를 사용했다. 이후 2024년 외교부에 로마자 성명을 ‘YI’로 변경해 달라고 신청했지만 외교부는 이를 여권법 시행령이 정한 정정·변경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재판 과정에서 이씨는 최초 여권 발급 당시 ‘YI’로 신청했음에도 담당 공무원이 임의로 ‘LEE’로 수정했다고 주장했다. 또 고등학교 시절부터 금융거래, 영어능력시험, 사원증, 군전역증명서 등에서 영문 성을 ‘YI’로 사용해 왔다며 여권 표기도 이에 맞춰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여권 관련 법령은 원칙적으로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된 한글 성명을 음절 단위로 음역에 맞게 로마자로 표기하도록 하고, 변경 사유 역시 예외적으로 제한해 열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대한민국 여권의 대외 신뢰도를 유지하고 출입국 심사 과정에서 동일성 식별을 확보하기 위한 취지”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최초 여권 발급 당시 공무원이 신청인의 의사와 달리 임의로 성 표기를 변경했다는 주장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원고가 당시 즉시 이의를 제기한 사실이 없고, 공무원이 신청인의 명시적 의사에 반해 임의로 표기를 수정했을 가능성도 낮다”고 봤다.
아울러 여권 표기를 변경하지 않더라도 이씨의 일상생활이나 경제활동에 현실적인 불편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고 역시 생활상의 불편 때문이 아니라 ‘YI’라는 표기를 선호하는 개인적 신념에 따라 변경을 신청했다고 밝히고 있다”며 “이 사건 처분이 재량권을 일탈하거나 남용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현행 여권법 제7조의2 제2항은 여권 재발급 과정에서 한글 성명의 개명 등 대통령령이 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로마자 성명의 정정이나 변경을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여권법 시행령은 로마자 성명 변경 사유를 △발음 불일치 △국외에서 장기간 사용한 다른 로마자 성명으로 인한 상당한 불편 △가족과의 성 표기 일치 필요 △배우자 성 추가·변경·삭제 △명백한 부정적 의미 △개명 △최초 여권 사용 전 변경 △미성년 시 사용하던 표기의 성년 후 변경 △해외이주 비자와의 일치 필요 △동명이인으로 인한 입국 규제 △그 밖에 출입국·국외 체류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으로 제한적으로 열거한다.
2023년 서울행정법원도 여권 로마자 성명 변경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이유에 대해 “여권의 대외 신뢰도 유지·확보와 출입국 심사 과정에서의 동일성 식별 필요성 때문”이라며 “변경은 현실적 생활상 불편을 해소할 필요성이 큰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법률사무소 로유 배희정 변호사는 “여권의 로마자 성명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신분 식별 정보인 만큼 단순한 선호나 개인적 사정만으로 변경이 인정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미 다른 로마자 표기를 장기간 사용해 금융거래나 취업, 해외 활동 과정에서 실질적인 불편이 발생했거나 가족 구성원과의 성 표기 불일치로 출입국 심사 과정에서 혼선이 생기는 경우처럼 객관적인 필요성이 입증돼야 변경이 가능하다”며 “단순한 표기 선호만으로는 법령이 정한 변경 사유로 인정되기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