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법정에서 판결문을 받아 든 순간을 기억하는가? 재판장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주문이 낭독되는 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을 느낀다. “징역 ○년을 선고한다.” 그 한마디가 귓가에 울리고, 손에 쥔 판결문은 인생의 종결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30년 동안 형사사건을 다루며, 1심 판결문을 ‘끝’으로 받아들인 사람과 ‘시작’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판결문은 종결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소심으로 향하는 지도이다. 많은 이들이 1심 판결문을 받으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판결문은 단순한 결과 통지서가 아니다. 그 안에는 법원이 어떤 근거로 유죄를 판단했는지, 어떤 정황을 불리하게 보았는지, 어떤 부분을 신뢰하지 않았는지가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판결문은 법원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항소는 바로 그 판단과정을 다시 검토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절차이다. 따라서 판결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히 읽어보는 것이 항소심의 출발이다.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인정하려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증명’이 필요하다(대법원 2014. 7. 24. 선고 2013도13416 판결)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장애가 있다는 이야기는 몰랐어요.” 필자가 만난 의뢰인은 장애가 있는 만 16세 미만의 미성년자와 성관계하고 이를 촬영한 혐의로 조사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필자에게 자신이 만난 상대가 장애가 있는, 그것도 만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따라서 사건의 쟁점은 명확했다. ‘의뢰인이 피해자의 나이와 장애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는가.’ 이것을 밝혀내는 것이 필자의 숙제였다. 처음 수사기관의 시선은 매우 차가웠다. 단순히 ‘성관계’를 했다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제강간’과 ‘성 착취물 제작’이라는 중대범죄가 함께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특히 장애인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법정형이 매우 높게 책정돼 있고, 사안의 특성상 조금만 대응이 늦거나 진술이 모호해도 구속의 가능성이 충분했다. 필자가 사건을 맡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성관계 사실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그가 피해자의 장애나 연령을 정확히 인식했는지 여부, 그리고 ‘촬영’이라는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철저히 구분해서 따져보아야 했다. 특히 성 착취물 제작 혐의의 경
이번 ‘법·알·못 상담소’ 코너에서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특정 주제를 정하는 대신 독자분들이 보내주신 개별 질문들에 하나씩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통은 비슷한 주제로 묶어서 정리해 드렸는데, 그러다 보니 계속 답변이 늦어지는 질문들이 있어서 이번에는 주제를 정하지 않고 자투리 질문들을 모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서신을 통해 직접 질문을 주신 분은 한 분일지라도 같은 고민을 안고 계신 분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드리는 답변들이 그분들의 답답한 마음을 덜어드리고,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Q.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공범 중 일부는 불구속 상태인데, 저는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제 형량이 더 무거워지게 되는 건가요? 재판부가 구속된 피고인에게 더 중한 형을 선고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A. 안에서 지내시면서 여러 가지 불안한 마음이 드실 것 같습니다. 먼저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드리면, 구속 상태라는 이유만으로 형량이 더 무겁게 선고되지는 않습니다. 수사단계에서 영장이 발부되어 구속되는 것은 ‘도주 우려’나 ‘증거인멸의 가능성’을 기준으로 한 판단으로, 유무죄 판단
Q. 안녕하세요. 9월 초에 선고유예 관련해서 편지 보냈었는데 아직 게재되지 않아 다시 질문드립니다. 성범죄 사건에서 어떤 경우에 선고유예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1심에서 형이 나왔다면 2심부터는 선고유예가 나오기 어려울까요? 판결이 있으면 함께 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꼭 답변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질문에 답변드립니다. 선고유예의 요건은 ‘1년 이하의 징역, 금고, 자격정지 또는 벌금형에 해당하는 범죄’, ‘전과가 없을 것’, ‘피해회복이 되었거나 사안이 경미하고 재범가능성이 없는 경우’입니다. 성범죄는 모든 범죄의 법정형이 매우 중하기 때문에 선고유예 판결이 적은 편입니다. 다만 법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같은 성범죄 혐의에도 누군가는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의 경우 카메라등이용촬영죄, 불법촬영물소지죄, 아동성착취물소지와 같은 디지털 성범죄는 물론 아동성매수와 같은 중한 성범죄 사건들에 대하여도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행해 온 동일 혐의의 검찰 기소유예 처분 사례를 다수 제출하고, 다른 법원의 선고유예 사례도 제출하는 등의 변론 활동을 통해 선고유예 판결을 이끌어 내
“1심에서 자백했는데도 실형이 선고되었다면, 항소심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석방되거나 감형받을 수있을까?” 많은 분들이 선처와 감형의 기대를 갖고 항소를 결심한다. 하지만 막상 항소장을 제출하고 나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1심에서 합의나공탁을 하지 못한 경우라면 항소심에서 새로 합의하거나공탁을 하면 유리하게 참작될수 있지만, 단순 음주 운전이나 무면허 운전처럼 피해자가 없는 사건에서는 이런 요소가 참작 요소로 발휘되기엔 제한적이다. 특히 1심에서 이미 자백까지 한 분들은 특히 더 막막함을 느끼곤 한다. 나는 검사 시절 항소심에서‘형을 높이는 역할’을 맡았다. 피고인의 항소가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형을 가중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그 과정에서 재판부가 어떤 점을 유심히 보는지를 몸으로 익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각을 피고인의 입장에서 완전히 뒤집어보고 있다. 과거 검사로서 냉정하게 판단했던 그 기준들을 선처와 감형의 기회로 바꾸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초 수사기록부터 다시 읽고, 사건의 흐름을 다시 정리하며, 1심에서 관과된 사실관계나 양형사유를 세심하게 짚어내 재판부가 사건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상담을 하다 보면 가장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반성문이나 독후감, 심리상담 확인서 등 이른바 ‘양형자료’를 제출하면 도움이 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라면 가장 효과적인 자료는 역시 피해자가 작성한 합의서입니다. 반면 그 외의 양형자료는 한두 장 더 제출한다고 해서 즉각적인 결과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1심에서 반성문과 탄원서를 충분히 제출했음에도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느낀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경험은 항소심 단계에서의 무력감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항소심 단계에서 실망감이 커지고,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 ‘아무리 써도 소용없다’라는 생각에 아예 양형자료 제출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구치소 안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작은 일에도 불안해지고 내가 지금 하는 노력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이 반성문 한 장이 실제 결과에 반영될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불안과 답답함이 결국 낙담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장 좋아하시는 스포츠가 무엇인지요?”라고 되묻습니다. 예를 들어 “축구입니다”라고 답하신다면, 이렇게
‘법.알.못 상담소’ 코너에서는, 구치소에 계신 안 사람들이 평소 궁금해하시지만 좀처럼 자세히 알기 어려운 주제들을 정해 하나씩 풀어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형사 재판절차’를 다루면서 독자 여러분께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는데요. 앞선 두 편을 통해 체포부터 항소심 종료까지의 절차에 대해 함께 살펴보셨습니다. 이제 그 마지막 단계, 3심 절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대법원에서 이루어지는 3심은 앞선 1심, 2심과는 구조가 다른 재판입니다. 막연한 불안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분들께, 이 글이 봄날의 단비처럼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Q. 항소심 선고 이후 상고를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일단 상고를 제기하는 절차 자체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하는 절차와 동일합니다. 선고일로부터 7일 이내에 상고장을 제출하면, 항소심 법원은 14일 이내에 소송기록과 증거물을 대법원에 보냅니다. 이후 대법원은 소송기록접수통지서를 피고인에게 보내고, 피고인은 통지를 받은 날부터 20일 이내에 상고이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이 기간 내에 상고이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상고기각 결정을 받게 됩니다. 문을 두드릴 기회조차 잃는
얼마 전 당황스러운 상담 전화를 받았다. 로펌 두 곳과 상담을 했는데 양쪽 말이 너무 달라서 누구 말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세 번째로 우리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처음 상담한 곳은 경찰 단계에서 쉽게 무혐의 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했고, 두 번째 상담한 곳은 지금 당장 구속될 수도 있으니 바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같은 사건인데도 입장이 180도 다르니 상담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담자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코인 구매대행 아르바이트를 하여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된 상태였다. 본인 계좌로 돈을 입금받아서 코인을 구매하고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송금한 것인데, 이는 범죄 조직에서 수익금을 세탁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내가 놀란 이유는 상담자가 코인 구매를 위해 입금받은 돈의 액수와 수수료 때문이었다. 어림잡아도 50억 이상을 받아서 코인을 구매했고, 그로 인해 받은 돈이 한 달 동안 7천만원 이상이란다. 그 과정에서 계좌 지급 정지도 여러 번 되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의 연봉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한 달 일하고 받았다는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정상적인 일이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돈의 출처에 문제가 없다면
형사 재판이라는 인생의 고난을 만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제가 의뢰인과의 상담 과정에서 자주 받는 질문들을 이 ‘법·알·못 상담소’ 코너를 통해 설명해드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궁금할 수 있는 것들, 그러나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어서 담당 변호사가 있어도 깊은 설명을 듣지 못하는 것들 위주로 답변을 드리고 있는데요. 이번엔 ‘형사 재판 절차 전반’에 대해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체포부터 상고심(=3심) 재판이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정리해볼 텐데, 이번 코너에서 전부 설명드리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것 같고 다음 코너까지 이어서 계속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저의 설명이 봄날의 단비처럼 안에 계신 분들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Q. 피의자가 체포된 후부터는 어떤 절차가 진행되나요? A. 구치소에 수감된 분들 중에는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구속영장이 청구되거나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분도 있겠지만, 체포 절차부터 시작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체포는 긴급체포‧영장체포‧현행범체포 등 종류는 다양하지만, 어쨌든 형사소송법에 의하면 ‘48시간 동안만 가능’합니다.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으면’ 반드
많은 피의자나 피고인들이 자신의 변호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변호사가 열심히 하지 않는다, 내 사건에 관심이 없다,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개별 변호사의 자질도 관련이 있지만 그 근원에는 수임료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있다. 같은 수임료를 두고 변호사는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고 고객은 너무 많이 주었다고 생각하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임료에 대한 인식 차이가 생기는 원인은 변호사의 보수 구조를 일반인들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고, 공적인 성격도 있으니 이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해결 방법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로펌마다 사정은 같지 않지만, 상당수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들을 만나보면 수임료를 받으면 회사(로펌)에 납부해야 하는 돈이 60~70%라고 한다. 이 돈으로 회사는 어쏘변호사나 비서의 월급, 사무실 임대료, 마케팅비용, 자동차, 기타 관리비를 낸다. 로펌 서면의 마지막 장을 보면 변호사들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보통은 3~4명, 보통은 5~7명씩 된다) 이들이 그 남은 30~40%의 수임료를 나누어 가진다. 이중 사건을 수임해 온 변호사에게 30~50%를 주고, 남은 금액을 남은 변호사들이 나눈다. 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