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가족끼리 소원하게 지냈더라도 매년 5월만큼은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을 떠올리고, 모처럼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 보기도 한다. 지난 14일, 가정의 달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한 가족에게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80대 부부 2명과 50대 여성 1명, 20대와 10대의 딸 2명 등 일가족 5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시신의 목 부위엔 졸린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들 일가족을 숨지게 한 범인은 가장인 이 모 씨였다. 이 씨는 사업 실패로 거액의 채무를 떠안게 되자 일가족을 몰살했고 본인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지만 실패 후 체포되었다. 사업 실패를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한 이 씨의 범행은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 2015년에 있었던 이른바 ‘서초동 세 모녀 살인사건’을 그대로 답습한 듯 유서를 작성하고 직접 신고한 정황, 가족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목을 졸라 살해한 범행 방식, 정작 자신은 살아남은 결과까지도 똑같다. 2015년, 40대 강 모 씨는 서울 서초구의 모 아파트에서 결혼한 아내 이 씨와 중학교 1학년인 첫째 딸, 초등학교 2학년이던 둘째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강 씨와 아내 이 씨는 서울
그동안 대한민국은 소위 ‘마약 청정국’으로 불려 왔다. UN은 인구 10만 명당 마약사범이 20명 이내일 경우 해당 국가를 마약 청정국으로 분류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지위를 유지하다가 지난 2021년 인구 10만 명당 마약사범의 수가 31.2명을 기록하며 탈락했다. 마약 청정국 재탈환 가능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밝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메스암페타민을 원료로 하는 필로폰 시장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 지역이 양분하여 갖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는 마약의 주요 생산지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마약 대부분이 동남아산이다. 주요 생산지와 접근성이 좋으니 거래가 늘 수밖에 없고 여기에 텔레그램과 같은 보안 기능이 강한 메신저와 암호화폐의 등장이 더해지며 국내 마약상들은 ‘마약왕’으로 성장했다. 경찰청은 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국내에 마약을 밀반입하던 마약왕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현지 경찰들과 공조하여 검거 작전을 벌여왔고 일명 ‘동남아 3대 마약왕’들로 불리던 이들도 모두 검거되었다. 이중 동남아 마약밀수 최상선이었던 K는 베트남에서 주로 활동하며 국내에 마약을 반입하다 2022년 베트남에서 검거돼 국내로 강제 송환됐다. K는 2
1990년 프로야구 구단 해태 타이거즈는 광주일고를 졸업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호성을 1차 2순위로 지명했다. 그가 받은 등번호는 27번. 이 씨는 당시 해태의 타격코치였던 대선배 김봉연의 번호를 물려받으며 구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호성은 그에 부응하듯 입단 직후부터 4번 타자로 불려 갔고, 2년 연속으로 KBO 골든글로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로 호명되는 등 일약 스타 선수로 떠올랐다. 각종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이호성의 이름은 18년 뒤 다시 한번 매스컴을 장식하게 된다. 200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네 모녀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바로 이호성이었다. 화려하게 데뷔해 해태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이호성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1년 프로야구선수협회장 활동을 끝으로 은퇴한 이 씨는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게 된다. 처음엔 승승장구했다. 자신의 연고지인 광주에서 본인의 이름을 딴 웨딩홀을 열었고, 그게 잘되면서 더 큰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이호성이 새롭게 손대기 시작한 사업은 스크린 경마 장외 발매소였다. 사업권을 따낸 이호성은 100억의 투자금을 끌어들여 7층짜리 건물을 세우기에 이른다. 하
조선, 북한, 대한민국. 살면서 세 개의 국적을 가졌던 남자가 향년 83의 일기로 별세했다. 1942년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 태어나 1961년 북한의 조선인민군이 되었고, 2025년 4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눈을 감았다. 1968년 1월 22일, 서울 육군 방첩부대 회의실로 한달음에 달려온 언론사들은 그곳에 붙잡혀 있는 한 남자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연신 터트렸다. 플래시 세례에 다소 상기되어 보였던 젊은이는 조사관의 질문에 천천히 답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이십칠 세, 소속은 조선인민군 124부대,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고 수하 간부들을 총살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김신조. 일명 ‘죽음의 공작조’로 불리던 북한의 대남 공작 최정예 특수부대의 요원이었다. 1968년 1월, 북한의 김일성은 당시 베트남 파병이 한창이었던 대한민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우리 군 병력이 약화 된 틈을 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적화통일의 계기로 삼으려는 속내였다. 그리고 1월 17일, 김일성은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특수요원의 대한민국 침투를 명령했다. 김신조 일당은 1월 17일 휴전선을 넘어 파주 문산 삼봉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아무리
1945년, 전북 군산에 한 주류회사가 설립되었다. 회사의 이름은 ‘백화양조’. 이 업체는 청주, 인삼주 등을 생산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소주 공장을 신설하며 사세가 점점 커진 백화양조는 1970년대에 이르러 계열사도 여럿 거느리게 되는 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때는 1978년 5월, ‘백화양조’가 한참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다. 그날도 보통날과 다름없이 공장 직원이 출근했고, 양조장을 둘러보던 중 직원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술통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여고생의 사체였다. 군산 소재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B 양(당시 18세)이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백화양조는 물론 지역이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사체가 발견되기 한 달 전인 1978년 4월 8일, 백화양조 계열사 사장의 아들이었던 A 군은 4시 30분쯤 오전 일찍 과외를 받으러 가는 B 양을 불러 세웠다.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던 B 양은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어 주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A 군은 군산 지역 재력가의 아들로 알려지며 또래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둘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갑내기로 서로 교제하던 사이였다
2002년 3월 당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MBC 예능 프로그램 ‘신동엽의 러브하우스’에 한 소녀가 출연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이는 어려운 형편에 장애를 가진 부모를 도우며 살면서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방송국의 도움으로 허름했던 집이 화사하게 변신하자 “나중에 커서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고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보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3월 29일, 착하기만 했던 소녀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인천지검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에 올라왔다. 인천지검은 도주한 두 명의 용의자를 공개수배 하는 방안에 대해 심의위에 의견을 물었고, 심의위는 피의자의 신상과 사진을 공개하기로했다. 공개된 용의자는 30대의 남녀로 그중 한 명이 바로 러브하우스에 나왔던 그 아이, 이 모 씨였다. 놀랍게도 이 씨가 받고 있던 혐의는 “살인”이었다. 불우한 환경에도 구김살 없이 자라던 소녀는 어쩌다 살인범이 되었을까. 사건 경위를 들여다보면 이렇다. 2019년 6월, 이 씨는 자신의 남편 윤 모 씨에게 자신의 친구들과 계곡에 가자고 했다. 물놀이 멤버에는 이 씨의 내연남 조 모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씨의 남편은 수영을 할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의 깊은 산골, 첩첩산중 사무곡.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 오지에서 영자양과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화전과 약초 캐기로 생계를 이어갔다. 영자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1주일을 다닌 것이 전부였다. 1997년, 오지 전문 사진작가 이지누 씨가 이들을 찾아갔다. 이후 몇 차례 방문하며 부녀와 친분을 쌓았고, 1999년 한 잡지에 영자 부녀의 삶을 소개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이 글은 예상치 못한 파장을 일으켰다. 방송국들이 영자 부녀를 찾아 나섰고, 결국 2000년 7월, KBS 2TV의 ‘인간극장’에서 ‘그 산골엔 영자가 산다’라는 제목으로 5부작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도시인들은 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녀의 모습에 열광했다. 영자의 순박한 미소와 소박한 삶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고, 전국에서 후원금과 선물이 쏟아졌다.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에도 출연하며 영자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영자의 삶은 급격히 변했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그녀는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서울에 상경하여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이러한 변화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방송을 통해 “영자가 산골을 떠
비극의 시작은 23년 전 봄이었다. 2002년 3월, 알 수 없는 이유로 실명이 된 한 남자가 뇌진탕, 화상, 자상을 연이어 입다 합병증으로 결국 사망했다. 그에게는 170cm의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으로 든 세 개의 보험에서 총 2억 8천여만 원의 큰돈을 58회에 걸쳐 수령했다. 2002년 3월 남편이 사망한 이후, 그녀의 주변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친어머니, 오빠, 남동생 모두 실명을 하거나 화상을 입었고, 첫 번째 남편이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만나 재혼한 두 번째 남편 역시 골절상, 실명, 화상 등의 상해를 입고 결혼한 지 9달이 채 되지 않았던 2003년 2월 사망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그녀와 관계된 사람 중 5명이 사망하였고, 친어머니와 오빠, 남동생, 가사 도우미 등은 화상을 입거나 실명하는 등의 사고를 당했다. 잇단 상해, 사망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 여인이 바로 단군 이래 최악의 악녀로 불리는 엄모 씨다. 엄 씨가 2005년 4월 경찰에 검거되며 그녀 주변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던 사건 사고도 멈췄다. 모든 사건의 범인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범죄 심리학자들 사이에선 엄 씨가
2011년 3월 서울, 광진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A 군이 부엌에 있던 흉기로 어머니 B 씨를 살해했다. 존속살해였다. A 군은 어머니를 살해한 뒤 시신을 안방에 방치하고, 사체 부패 시 냄새가 집 밖으로 빠져나갈 것을 우려해 공업용 본드로 안방 문틈을 밀폐했다. 당시 집안에는 A 군과 B 씨밖에 없었다. A 군의 아버지이자 B 씨의 남편은 2006년경부터 별거 상태였다. 어머니를 살해한 뒤에도 A 군은 평소와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오히려 B 씨가 살아있을 때보다 생활 자체는 더욱 자유롭고 편안했다. B 씨가 살아있을 땐 상상도 못했던 영화 감상을 했고, 온라인 게임에 빠져들었다.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라면도 끓여 먹고 여자 친구와 강릉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B 씨를 찾는 이웃과 친지들에겐 ‘어머니와 따로 살기로 했다’, ‘해외여행을 갔다’ 등으로 둘러댔다. 그 사이 A 군은 수능시험도 치렀다. A 군의 범행이 발각된 건 범행 시점으로부터 반년이 훌쩍 지난 11월이었다. 가족과 별거 중이었던 A 군의 아버지가 이혼을 결심하고 B 씨를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고, A 군이 B 씨가 해외여행을 갔다
팬데믹 이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영화업계에 지난 연말 영화 한 편이 깜짝 흥행을 일으키며 모처럼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개봉 8일 차에 누적 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한 이 영화의 제목은 <소방관>, 곽경택 감독이 연출했고 배우 주원, 곽도원, 유재명 등이 출연했다. 흥행 이유 중 하나로 20여 년 전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가 제작됐다는 사실이 언급되는 가운데, 영화 제작사는 유료관객 1명 당 119원의 성금을 대한민국 소방관 장비 및 처우 개선을 위한 현금기부를 하겠다고 밝혔다. 2001년 3월 4일 새벽, 서울서부소방서(현 은평소방서) 대원들은 녹번동 화재 오인 신고로 출동했다가 철수하는 중이었다. 오전 3시 47분, 서울 서부소방서에 한통의 신고가 접수됐다. 서대문구 홍제동 다가구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대원들이 복귀 중에 들어온 신고였기 때문에 출동시간이 평소보다 단축되었고 평소보다 빠르게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방대원 앞을 가로막은 건 불법 주차 차량들이었다. 골목을 가로막은 차량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었고 대원들은 결국 20kg가 넘는 장비를 직접 들고 화재현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