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A 씨는 가족들과 평소와 다름없는 저녁 시간을 보냈다. 네 식구가 사는 보금자리에서 아내, 만 3살, 10살의 두 아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평소처럼 식사 후 담배를 태우러 아파트 정문 밖으로 나왔다. 겨우 담배 한 개비, 길어야 10분 내외로 끝났어야 할 A 씨의 짧은 외출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2024년 7월 29일, 서울 은평구 아파트에서 30대 남성 백모 씨가 긴급체포되었다. 백 씨는 1시간 전 같은 아파트 입주민이었던 40대 남성 A 씨에게 약 102cm 길이의 장검을 휘둘러 숨지게 했다.
백 씨는 아파트 정문 앞에서 1차 공격을 가한 뒤 A 씨가 경비실 쪽으로 도망가자 경비실 앞까지 따라가 다시 한번 칼을 휘두르고 본인의 집으로 달아났다. A 씨는 백 씨의 칼에 얼굴과 어깨 등이 10여 차례 찔린 채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끝내 숨졌다.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 주민이었지만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일면식도 없는 이웃 주민을 살해한 백 씨의 범행은 일명 ‘묻지 마 살인’으로 불리는 ‘이상 동기 범죄’의 또 다른 사건으로 분류된다. 검찰은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2부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백 씨가 ‘중국 스파이가 대한민국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망상에 빠져 피해자가 자신을 미행하는 스파이라고 생각해 범행을 저질렀고, 피고인이 피해자를 처단한다는 분명한 의식과 목적하에 살해했다며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백 씨 측은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감형을 시도하고 있다.
만약 법원이 심신미약을 인정할 경우 형의 감형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백 씨의 범행이 무작위 살인이었다는 점에서 가중 처벌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언젠가부터 일면식 없는 사람을 무차별 공격하는 이상 동기 범죄가 사회의 불안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23년 7~8월에는 신림역과 서현역에서 칼부림 사건이 각각 발생했고, 작년엔 백 씨 사건 외에도 순천 여고생이 이유 없이 살해당했다.
흉악범들의 체포 구금 소식에도 장소를 불문한 이상 동기 범죄가 꾸준히 발생하는 탓에 사회적 불안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못하는 상황이다.
더구나 해당 범죄 가해자들이 사형이 아닌 징역형(무기징역 포함)을 확정받았다는 사실도 공포심을 유발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에 교정본부는 전국 교도소에 분산 수감되어 있던 이상 동기 범죄 가해자들을 경북북부제2교도소로 이감시켜 맞춤형 프로그램 및 전문 상담으로 이들의 범죄 성향을 집중적으로 개선하기로 했다.
옛 청송교도소이기도 한 경북북부제2교도소는 국내 유일의 중(重)경비 교도소로 흉악범들을 주로 수용해온 교도소다. 조직폭력배 김태촌과 조양은, 탈옥수 신창원, 초등학생 성폭행범 조두순, 토막 살인범 오원춘 등이 이곳에 수감된 바 있다.
교정본부는 경북북부제2교도소를 흉악범 전담 시설로 지정하고 이상 동기 범죄자 포함 흉악 범죄자 20명을 이곳으로 이감했다.
경북북부제2교도소는 800여 개 수감실 중 700여 개가 독방이고, 방 안에는 24시간 CCTV가 작동한다. 수용자는 하루 1시간 운동을 제외하고는 모두 독방에서 지내야 된다. 외부인 접견 등도 엄격하게 통제된다. 교정본부는 이상 동기 범죄자 등의 흉악 범죄자를 이곳에 모아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자기통제 능력을 키우고 피해자 입장을 공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맞춤 프로그램으로 사회 교화를 도우려는 목적이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는 ‘신림역‧서현역 흉기 난동 살인 사건’과 같은 이상 동기 강력 범죄를 막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흉기를 소지하거나 온라인 등에서 불특정 다수를 협박한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기로 했다. 이에 따라 법무부는 2025년 주요 업무 추진 계획을 보고하고 공공장소 흉기소지죄와 공중협박죄를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행위를 협박죄, 폭력행위처벌법 등 현행법만으로 처벌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A 씨의 아내는 결심공판 증인으로 출석해 해당 사건을 “일면식도 없는 이웃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묻지 마 범죄’이자 계획된 살인 사건”이라며 “한 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무참히 살해한 살인마를 영원히 격리해달라”라고 호소했다.
피해자 측 법률 대리인 역시 “절대 심신미약의 형사적 책임 감경이 있어선 안 된다”라며 법정 최고형을 내려달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검찰이 구형한 사형이 실현될지, 심신미약 소견이 감형 사유로 작용할지는 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백 씨에 대한 선고기일은 다음 달 13일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