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규의 수사반장 (16화) 천사의 도시 앙헬레스로 떠난 L 경감(1)

엘리트 경찰 L 경감의 선택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부임
유흥도시 앙헬레스에 총성
한인교민의 피살사건 발생

 

 

L 경감은 경찰이 된 이후 거침없는 승진 가도를 달려온 엘리트였다. 2015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경감으로 승진한 후 주변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의 마음은 공허하였다. 그의 대학 동기들은 국정원에서 근무하거나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가끔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의 L 경감은 늘 도전과 모험을 꿈꿨다. 경찰이 된 후엔 승진과 성과가 최대의 모험이라 생각했지만 너무 이른 성공은 오히려 그의 갈증을 키웠다. 더 크고, 낯선 세계로의 도전이 필요해졌다.


새로운 목표를 찾아 나선 L 경감은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학문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눈길을 끄는 공고 하나를 발견했다.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공고였다. 코리안데스크는 필리핀 현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벌어지는 강력범죄를 전담해 필리핀 경찰과 공조수사를 펼치는 곳이었다.

 

2000년대 들어 필리핀에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급증했고, 이에 2010년부터는 마닐라에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하고 경감급 베테랑들이 현지에 파견되어 직접 사건 수사에 뛰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L 경감이 본 공고는 마닐라 쪽이 아닌 앙헬레스에 신설되는 코리안데스크 직원 모집이었다.


L 경감에게 ‘앙헬레스’라는 도시는 이름조차 생소한 도시였다. 다만 그곳이 스페인어로 ‘천사들(Angeles)’이라는 뜻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L 경감은 석사과정이 끝난 뒤 해외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터라 큰 욕심 없이 지원했다. 서류만 통과돼 면접이라도 보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L 경감이 면접을 보러갔던 날, L 경감은 면접장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서류 통과자는 총 6명이었지만, 면접장에 나타난 사람은 L 경감을 포함해 단 두 명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L 경감은 알지 못했다. 이름만 보면 천사들이 거니는 도시 같지만 그곳은 천사조차도 총에 맞아 살해될 수 있는 악명높은 도시였다.

 


기대는커녕 잊고 지냈던 지원 결과가 합격 통지서로 날아왔을 때, L 경감에겐 그제야 걱정이 밀려왔다. 그는 서둘러 앙헬레스에 대한 사전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설었던 도시의 실체가 하나둘 눈앞에 펼쳐지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필리핀에 대해 잘 아는 동기에게 전화해 앙헬레스에 관해 물었더니 동기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인마, 가지 마. 가면 너 죽을지도 몰라” 앙헬레스, 이른바 천사의 도시는 사실 천사가 먼저 도망친 도시였다.


2015년 2월 L 경감은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뜨겁고 눅눅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감쌌다. 피부에 달라붙는 끈적한 습도가 마침내 도착한 이국의 현실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이 도시에 대해 미리 알아 온 정보들을 바탕으로 L 경감은 앙헬레스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관광지라지만 이곳을 찾는 여성 관광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남성들이 찾아왔다. 2012년 앙헬레스 주변 화산 폭발로 미군이 떠나자 이곳의 경제는 미군 대신 남성 관광객의 유흥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골프, 카지노, 술, 마사지 그리고 그 끝엔 성매매로 이어지는 관광은 이 도시에서 빈번한 코스였다. 이곳에는 한국에서 도피해 온 수배자들이 적지 않았다. 코리안데스크의 주요 업무가 바로 해외로 도망친 한국인 수배자들을 찾는 일이었다.


공항에서 L 경감을 맞이한 사람은 필리핀 주재관이었다. 정중한 악수와 짧은 인사말이 오갔지만 L 경감은 그 짧은 눈빛 속에서 그가 본인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주재관이 가능하면 수사 경험이 풍부한 형사를 코리안데스크로 파견해달라고 한국 경찰청에 요청했던 터였다.

 

앙헬레스의 치안이 워낙 좋지 않으니 노련한 베테랑이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재관 앞에 나타난 건 30대 초반의 젊은 L 경감이었다. 주재관의 마음속에는 이 청년이 앙헬레스를 책임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일었다.


그날, L 경감은 대사관 직원의 차를 타고 앙헬레스로 이동했다.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이었다. 좁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느라 요동치는 차 안에서 L 경감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이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갑작스레 불안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코리안데스크로 파견된 이상, 후퇴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전진뿐이라고 L 경감은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후, L 경감을 태운 자동차가 앙헬레스의 작은 경찰서 앞에 멈추었다. 그가 근무할 코리안데스크가 이 건물 안에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L 경감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2월임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날씨는 가히 찜통이라 부를 만큼 더웠다.

 

그런데도 사무실 안에는 에어컨이 없어 경찰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에어컨이 없는 이유는 더 황당했다. 전직 서장이 다른 곳으로 발령받으면서 에어컨을 떼어갔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L 경감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사무실에 새 에어컨을 설치했다. 함께 근무하는 필리핀 경찰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반가워했다.


한편, L 경감은 앙헬레스 인근의 안전한 주택가에 숙소를 구했다. 2년 내내 그곳에서 차를 몰고 코리안데스크로 출퇴근했다. 운전 중에는 늘 백미러로 주위를 주시했다. 오토바이를 탄 킬러들이 천사처럼 날아들어 창문에 총을 쏘고 사라지는 곳이 바로 앙헬레스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에게 앙심을 품을 사람들이 앙헤레스에는 제법 있었다.


앙헬레스의 한인타운 교민은 2만 명이나 되었다. L 경감의 코리안테스크 부임은 이곳 교민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였다. 하지만 주재관이 그랬듯 교민들 또한 처음부터 L 경감에게 호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호의는커녕 인터넷 카페 등에 L 경감에 대한 뒷말이 무성하기까지 했다.

 

주로 그의 젊은 나이에 대한 불만이었다. 나이 지긋한 베테랑 형사를 기대했던 주민들의 바람과 달리 말쑥한 차림의 젊은 경찰이 부임했으니 걱정이 많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카지노나 성매매에 빠져 방탕하게 놀고 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L 경감은 자신을 둘러싼 여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처신 하나 잘못하면 욕을 먹는 건 L 경감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 전체였다.

 

L 경감은 코리안데스크로서의 업무를 성실하고 충실하게 해냈다. 그의 진심에 따가웠던 교민들의 시선도 점차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스트레스는 있었다. 앙헬레스라는 작은 도시에 교민들이 2만 명이나 있다는 것은 2만 개의 CCTV가 있다는 것과 같았다. 그가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든 그것을 알아보는 교민들이 한두 명은 꼭 있었다. 교민들의 관심이 싫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교민들 사이에 수배자들이 섞여 있었고, 누군가 앙심을 품고 공격한다면 너무나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L 경감은 수배자를 찾아내는 코리안데스크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매달 한두 명의 수배자를 앙헬레스에서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익명의 협박 메시지들도 많이 받아야 했다. L 경감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마음속엔 늘 한 줄기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늘 창가에 앉았다. 누군가 갑자기 들어와 총을 겨눈다면 창문 밖으로 탈출할 경로를 계산하며 식사했던 것이었다.


L 경감이 맡은 코리안데스크 업무에는 수배자를 찾는 일 외에도 한인과 관련해 벌어지는 사건을 수사하는 일도 있었다. 역시나 그가 부임해 있는 동안 앙헬레스에서 한인 피살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2015년 9월 17일, 앙헬레스 한인타운에서 벌어졌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린 한 남자가 한인타운의 멕시칸 식당 2층에 있는 부동산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대뜸 A 씨(남성, 60대)가 누구냐고 물었다. A 씨가 본능적으로 자리에 일어선 순간 총성이 공기를 갈랐고, 그가 난사한 총알이 A 씨의 복부, 허벅지, 엉덩이에 박혔다. 남자는 재빠르게 현장에서 사라졌다.


당시 L 경감은 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고, 그는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전화는 현지 필리핀 경찰의 전화가 아니었다. 교민이 걸어온 청부살인 제보 전화였다.

 

L 경감은 현장에 있던 CCTV를 확인했지만 모자와 선글라스로 위장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범인이 타고 온 차량의 번호판도 보이지 않았다. 앙헬레스는 CCTV가 도시 곳곳에 깔려있는 서울이 아니었다. 현장 CCTV에서 증거를 찾지 못하면 범인을 찾을 확률은 아주 희박했다.

 

하지만 마치 하늘이 도움을 내리듯 현장에서 범인의 얼굴을 직접 본 목격자가 피의자 몽타주 제작을 도왔다. 범인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L 경감은 피해자 A 씨를 노린 청부살인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본격적인 탐문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망을 좁혀가던 중 L 경감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필리핀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용 호텔까지 운영하는 A 씨는 앙헬레스 곳곳에 적을 만들어온 인물이었다. 그의 주변 모두가 그를 노리는 적이었다.


(천사의 도시 앙헬레스로 떠난 L 경감(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