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던 북한 공작원, 목사 되어 역사 속으로

적화통일 노린 북한 김일성 지시
특수부대원으로 1.21 청와대 습격
투항 후 대한민국에 귀순 의사
목회자로 새 삶 살다 83세 별세

 

조선, 북한, 대한민국. 살면서 세 개의 국적을 가졌던 남자가 향년 83의 일기로 별세했다.


1942년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 태어나 1961년 북한의 조선인민군이 되었고, 2025년 4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눈을 감았다.


1968년 1월 22일, 서울 육군 방첩부대 회의실로 한달음에 달려온 언론사들은 그곳에 붙잡혀 있는 한 남자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연신 터트렸다. 플래시 세례에 다소 상기되어 보였던 젊은이는 조사관의 질문에 천천히 답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이십칠 세, 소속은 조선인민군 124부대,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고 수하 간부들을 총살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김신조. 일명 ‘죽음의 공작조’로 불리던 북한의 대남 공작 최정예 특수부대의 요원이었다. 1968년 1월, 북한의 김일성은 당시 베트남 파병이 한창이었던 대한민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우리 군 병력이 약화 된 틈을 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고 적화통일의 계기로 삼으려는 속내였다. 그리고 1월 17일, 김일성은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특수요원의 대한민국 침투를 명령했다.


김신조 일당은 1월 17일 휴전선을 넘어 파주 문산 삼봉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아무리 고도로 훈련된 특수부대였어도 31명이나 되는 적지 않은 인원이 움직이는 작전이었고, 곳곳에 있는 민간인들의 눈을 모두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신조 일당을 최초로 발견한 건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왔던 우 씨 4형제였다. 자신들의 존재가 발각된 걸 알게 된 김신조 일당은 우 씨 형제의 사살을 고민하다가 형제에게 공산당 입당 원서를 쓰게 하고 목숨을 살려주었다.


김신조를 비롯한 특수요원들은 30㎏ 군장을 하고 시속 10km의 속도로 산을 넘었다. 휴전선을 돌파한 지 나흘 만인 1월 21일, 마침내 요원들은 종로구 자하문 인근에 도착하게 된다. 청와대를 목전에 둔 곳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31명이 5개 조로 나뉘어 청와대로 진입, 4분 만에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우 씨 형제의 신고로 서울 시내의 경찰들은 이미 비상근무에 돌입해 있었다. 그리고 끝내 불심검문을 강화하던 경찰들과 김신조 일당이 대치하기에 이른다.

 


무장 공비들은 자동소총을 발사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들이 난사한 총알에 당시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던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김신조 일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나가는 버스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하는가 하면, 뿔뿔이 흩어져 서대문구 홍제동 등에서 시민들과 격투를 벌이며 민간인 5명의 목숨도 앗아갔다.


군은 즉각 군경합동수색진을 꾸려 무장 공비들을 추격, 소탕 작전을 펼쳤다. 군경합동수색진은 서울부터 경기도 일원까지 샅샅이 뒤져가며 작전을 전개했고 서울에 침투한 31명의 무장 공비 중 28명을 살해했고, 2명은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간주해 1월 31일 작전을 종료하였다. 김신조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러 내려온 무장 공비 31인 중 유일하게 생포된 북한군이었다.


살아남은 김신조는 먼저 투항하였고, 침투 당시 총을 한 발도 쏘지 않는 등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참작돼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하고 1970년 4월 주민등록증도 받았다. 같은 해엔 3살 연하의 부인과 결혼도 했다.


김신조의 귀순 결심에는 본인이 살아있는 증거임에도 연관설을 부정하는 북한의 태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목숨을 잃은 요원들의 유해 인수도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방송에 출연한 김신조는 당시의 심정에 대해 “그럼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는 생각에 화가 나더라고 털어놓았다.


대한민국에서 새롭게 시작한 김신조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김신조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불안했던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1997년 1년 안수기도를 받고 목회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북한에 있는 고향 청진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한 채 2025년 4월 9일 눈을 감았다.


김신조 외 무장 공비들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은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 창설과 방위산업공장 설립 추진의 계기가 되었고, 사건 이후 보안상 문제로 50년 넘게 출입이 통제되었던 북악산은 2022년이 되어서야 재개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