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변호사 일이 아니라도 모든 일은 미리미리 일을 해 놓으면 좋다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변호사 일은 더더욱 그렇다. 선고 전날 변론요지서를 제출하거나 항소이유서 제출 기한 마감일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런 경우는 대개 변호사가 마감 기일에 촉박해서, 그러니까 마감 기일 전날부터 이런 서면을 작성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시간에 쫓겨서 작성하는 서면의 품질이 좋을 리 없다. 좋은 서면을 쓰려면 기록을 여러 번 꼼꼼히 읽고, 관련된 다른 사례나 판결례를 광범위하게 조사해서 반영하고, 완성된 초안을 거듭 다시 보면서 고치고, 다른 사람의 피드백까지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마감에 쫓기면 이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판사로 일할 때 변호사가 변론 기일 전날 서면을 제출하거나, 선고 직전에 변론요지서를 제출하거나, 항소이유서의 마감날 항소이유서를 제출하거나, 서면 제출을 계속 미루다가 도저히 더 미룰 수가 없을 때 제출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는 판결 선고 전 일주일 전 또는 사나흘 전에 판결문을 다 써 놓았는데, 선고 전날에 변론요지서를 받으면 그것을 찬찬히 읽고 판결문에 반영하기가 어렵
강남에서 자동차 딜러로 일하던 A는 어느 날 고객으로 네 명의 남자를 만났다. 평범한 고객으로 다가온 그들은 차량 리스와 구입을 진행하며 A와 친분을 쌓았다. 그들의 젠틀한 태도와 현금으로 두둑한 지갑, 확장되어 가는 사무실 규모는 A에게 그들이 성공한 사업가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B는 가장 호감형의 인물로 A에게 종종 상품권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더니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까지 하게 된다. 꽤 괜찮은 수익을 보장한다며 B는 자신이 하는 상품권 거래는 합법적인 사업이며, 단지 통장을 빌려주는 것뿐이라며 A를 안심시켰다. 보이스 피싱을 의심하는 A에게 B는 단순한 편법일 뿐, 중국의 큰손들이 들어와 상품권을 대량으로 사는 거래라고 답했다. 그렇게 A는 B의 말만 믿고 상품권 거래에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통장 관리와 수표인출 업무를 맡았다. B는 A에게 인출 할 수표의 권면액과 장수를 정확히 지시했고, A는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A는 점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상품권 거래를 의뢰하는 회사들의 신분증과 사업자등록증은 정상적이었지만 그 거래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A는 B가 대신해 상품권 거래를 해준다고 하여
2018년 12월 25일, 사람들은 연인, 가족, 친구와 함께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만끽하고 있었다. 도심은 캐롤로 가득했고 거리마다 반짝이는 전구와 붉은 리본이 도시를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평화로움도 잠시, 하늘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건 하얀 눈이 아니라 연기였다. 김해시청 뒤편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진해졌고, 어느덧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멈춘 곳은 시내에서 불과 500미터에서 떨어진 김해시 구산동 분성산이었다. 다행히 헬기 6대가 곧바로 출동해 불길을 잡았지만 갑자기 발생한 산불은 시가 2,200여만 원 상당의 소나무를 소훼시켰다. 분성산은 형사 K가 근무하는 김해중부경찰서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닷새 후, 분성산에서 또다시 불길이 올라왔다. 야간 산불은 낮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헬기와 소방차 출동이 어려웠고 두 번째 산불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겨울철 건조한 날씨에 산불이 나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형사 K는 같은 장소에서 닷새 간격으로 벌어진 산불에 방화를 의심했다. 형사 K는 팀원들과 시청 공무원과 함께 분성산 일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잿더미 속에서
정당방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다.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접하는 표현 중 하나로, 억울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거 정당방위 아니야?”라며 쉽게 말하곤 한다. 이처럼 정당방위라는 단어는 국민 정서에 널리 퍼져있고, 언론에서도 종종 다뤄질 만큼 친숙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이 단어를 법률 용어로 쓰려고 할 때는 고민이 생긴다. 정당방위는 부당한 법익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에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는 처벌하지 않는 제도다. 문제는 현실에서 이 정당방위를 인정받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점이다. 제도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수사기관과 법원은 이 ‘상당한 이유’ 인정에 매우 인색하다. 흔히 발생하는 폭행 사건에서는 더욱 그렇다. 평범한 직장인 A 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 후 헬스장을 찾았다. 평소와 같은 날이었지만 그날 A 씨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날벼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A 씨가 헬스 기구를 이용하려는 중 B 씨와 마주쳤고 서로 누가 먼저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다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기분이 상한 B 씨는 갑자기 A 씨의 부모를 언급하며 시비를 걸었다. A 씨는 키도 크지 않고 체격이 마른 편이었고,
“변호사를 꼭 불러야 하나요?” 형사사건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사만 받는 건데, 법정도 아니고 굳이 변호사가 필요할까요?”라고 물어온다. 형사 조사,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한 빨리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것이 좋다. 형사사건에 연루되어 조사 대상이 되는 순간, 가장 중요한 조치 중 하나가 전문 변호인의 도움을 즉시 받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차후에 있을지 모를 법정 대응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수사 단계부터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지키고 사건의 불필요한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형사 절차는 수사기관의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남긴 말 한마디가 사건 전체의 방향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때는 잘 몰랐어요”, “실수였어요”라는 말은 법정에선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수사 초기 경찰이나 검찰에서의 진술은 대부분 ‘조서’라는 형태로 정리, 문서화 되어 이후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된다. 초기 조서에 담긴 진술 내용이 나중에 법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면 다행이지만, 실제로는 수사 과정에서 긴장 상태에서 말을 잘못하거나 상황을 오해한 채 불리하게 진술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렇게 남긴 수사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갈 여유가 없어서 직원들과 배달의 민족(‘배민’)으로 유명 유튜버가 추천했다는 비싼 김밥(‘김밥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도 있다)을 3인분 시켰는데 달랑 2인분만 왔다. 직원이 바로 배민에게 얘기하고 1인분 금액 9천원의 환불을 요구했으나, 배민은 김밥집 사장이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고 한다. 배민 싸이트에 들어가 보니 이 김밥집에는 우리와 같은 불만을 토로하는 수많은 댓글이 달려있었다. 주문한 양과 배달한 양이 불일치한다, 그 뒤로는 연락을 받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찾아가서 항의하기 전에 빨리 환불을 해달라 등등. 오늘 직원들과 함께 어느 식당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직접 한번 그 김밥집에 가보자고 했다. 김밥집은 유리벽 내부가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초록색 썬팅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왼쪽 구석에 고속버스 터미널 매표소 같이 작은 문이 나 있고 그 앞 테이블 위에 주문을 받아서 만든 김밥을 쌓아두고 있었다. 그 창구도 내부를 잘 볼 수 없도록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그 안을 힐끔 살펴보니 또 하나의 벽 위로 ‘출입엄금 – 이곳은 나의 사유지이므로 방해할 수 없음’이라는 취지의 글이 빨간색 손글씨로 적혀 있어서, 역시 뭔
7월 2일 오전 충남 당진경찰서, 강력2팀의 형사 C는 긴급통신영장을 작성하고 있었다. 살해당한 두 자매 A 씨와 B 씨, 그리고 동생 A 씨의 연인이자 살인 용의자인 D 씨의 휴대폰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각까지도 형사들은 D 씨의 행방을 전혀 알지 못했다. 형사들은 두 자매의 카드내역 확인을 위해 금융계좌 압수수색영장도 신청했다. 형사들은 세 사람의 통화내역과 자매의 카드 사용기록을 확인하면서 범인의 동선을 추적할 계획이었다. D 씨가 두 자매의 신용카드를 훔쳐 간 상태였기 때문에 도피 중 해당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거나 결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베테랑 형사들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6월 26일 새벽 4시경 당진시의 한 편의점 ATM 기계에서 언니 B 씨 명의의 체크카드에서 30만 원이 인출된 기록이 확인됐다. 그리고 같은 날 대전에서 D 씨는 또 다른 ATM 기계에서 300만 원을 인출했다. 범인이 당진에서 범행 직후 곧바로 대전으로 도주했다는 증거였다. D 씨의 움직임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7월 1일 밤 11시경에 D 씨는 다시 당진시의 한 은행으로 돌아와 129만 원을 추가로 인출해갔다. 당진경찰서 강력2팀 형사들은 재빨리 움직였
20년 지기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박 변호사, 큰일이다. 나 음주 운전 걸렸어. 나 좀 살려줘”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공무원 신분이라 음주 운전만으로도 신분에 큰 타격을 입고, 잘못하면 파면이나 해임이 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음주 운전 사건은 정해진 증거, 즉 음주 측정치 또는 혈액검사 결과 등에서 혈중알코올농도가 명확히 나오기 때문에 증거법상 방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측정이 안 된 경우라면 며칠 후 경찰에 출석해 혈액검사를 받게 되고 그때 혈중알코올농도가 측정이 안 되는 경우가 생기면 다툼이 생기긴 하지만, 단속할 때 음주 측정을 거부하기 위해 차를 버리고 도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뿐 아니라 누구든 그런 행동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최근에 운전 후(정차 후) 186분이 지나고 음주 측정을 해 위반 수치가 나왔는데 무죄 선고가 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정차 후 술을 사서 먹었다는 변소와 정차 후 술을 샀다는 것을 봤다는 주변인들의 진술이 보강되어서였다. 전화 온 친구는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다가 횡단보도에서 잠시 졸았는데 그때 단속이 되었다고 한다. 수사 결과 22시 10분까지 술을 마시고 출발하여 운행하다가 22시 30분에 경찰이 출동,
우리나라의 수사와 재판은 서면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현실상 판사는 일주일에 수십 건의 사건을 재판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각각 짧은 시간 동안 쪼개서 만나고, 하나의 사건을 짧게는 반년, 길게는 1-2년씩 재판하며, 인사이동 때마다 판사가 바뀐다. 그러니 어느 한 기일에 한 순간 말을 잘 해서 좋은 인상을 주더라도 판사가 다 기억해서 재판에 반영하기 어렵다. 판사가 재판을 마치고 판결문을 작성할 시점에는 대부분 기억과 인상은 휘발되어 희미해지고, 사실상 대부분 기록에 적힌 글들만 보고 판결한다. 그래서 좋은 재판 결과를 받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기록에 남아있는 글이다. 다른 글을 잘 안 보는 판사도 변호사 의견서는 꼼꼼하게 본다. 전관예우도 사라진지 오래라고들 하므로, 좋은 글의 힘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 판사, 검사, 수사관의 마음을 1센티미터라도 더 움직이려면 좋은 글을 써야 한다. 나는 30년 동안 여러 종류의 글을 꾸준히 직접 써왔다. 대학시절부터 소설을 써서 ‘보헤미안랩소디’로 제10회 세계문학상을, ‘소설 이사부’로 제1회 매일신문 국제동해문학상을 받았고 장편소설을 4권 출간했다. 판사로서 10여년 이상
집에 있는 시간보다 법정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변호사이지만 변호사인 나에게도 법정 분위기는 언제나 숨막히게 다가온다. 특히 형사 사건이라면 더 그렇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재판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날은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날씨였다. 실내외 온도차이로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연락을 받았다. 고향 친구와 친한 분이 아동 강제추행으로 수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관을 포함해 누구도 그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이라는 말에 감기 기운도 잊고 바로 사안 파악을 시작했다. 사건은 이미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 조사가 이미 끝난 상황이라 나는 재판부터 조력을 시작했고, 첫 번째 기일에 일을 저질렀다. “존경하는 판사님,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고자 합니다.” 피해 아동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고 나는 피해자에게 증인 심문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을 제시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공개 국민참여재판으로 재판은 진행되었고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법정에서의 다툼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때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꽤 어려운 과정이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자료를 검토한 후였지만, 놓친 부분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어 종이가 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