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초순의 한 밤, 광주 북부경찰서 강력계 형사 S는 야간 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두꺼운 사건 파일에 눈을 박고 있는데 살인 사건 발생 소식이 전해졌다.
“8층 아파트, 사체 상태가 이상합니다” 지구대 경찰이 전해 온 한 마디에 형사 S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운전대부터 잡았다. 형사 S는 운전대를 단단히 움켜쥐고 사건 현장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았다.
현장은 광주광역시의 한 아파트 단지였다. 현장에 도착한 형사 S는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팀원들과 함께 사건이 벌어진 8층의 한 집으로 올라갔다. 집은 평범하였고 대체로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형사 S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진입했다.
사체는 아파트 베란다 끝에 위치한 작은 창고에서 발견됐다. 피해자는 80대의 여성 A 씨였다. A 씨의 신변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린 건 그녀의 두 딸 들이었다. 딸들은 평소처럼 A 씨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았다. 평소 어머니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던 터라 연락이 닿지 않자 딸들은 모종의 불안감을 느꼈고 결국 큰 딸이 그날 오전 어머니의 집에 방문하기에 이른다.
큰 딸이 어머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늘 그렇듯 정돈된 상태였고 현관에도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의 신발과 가방이 보이지 않아 A 씨가 어디 잠깐 외출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A 씨와 연락이 닿지 않았고 한밤중이 되도록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결국 자매는 어머니가 실종되었다고 판단해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자정을 넘긴 시각, 지구대 경찰 두 명이 자매와 함께 A 씨의 집을 다시 찾았다. 집 내부를 꼼꼼히 살피던 경찰은 이들 자매가 베란다 쪽은 살펴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베란다로 통하는 거실 문을 열었다. 베란다 자체는 평범해 보였다.
빨래 건조대와 몇 개의 화분이 놓여 있었고 A 씨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경찰의 눈에 베란다 끝에 있는 작은 벽장이 들어왔다. 베란다 구석에 자리 잡은 이 작은 창고는 평소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보였고 경찰은 별다른 의심 없이 벽장 문을 열었다. 벽장 안에 들어 있던 건 뭔가를 덮고 있는 이불더미였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낸 순간 괴기한 자세로 숨져있는 A씨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형사 S는 사체가 남긴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체는 마치 물구나무를 서듯 머리가 아래로 향해 있었고, 혈액이 중력에 의해 아래로 몰리며 검붉은 시반이 얼굴에만 몰려 있었다. 누군가 사체를 이불에 싸서 거꾸로 이 작은 벽장에 집어넣은 듯했다. 또한, 피해자의 신발과 가방이 함께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피해자가 외출한 것처럼 꾸미려는 의도가 보였다.
사체 주변에 혈흔이 없고, 족적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와 베란다로 오면서 통과해야 할 문과 잠금장치도 멀쩡했다. 즉, 외부에서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범인은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형사 S는 사건 해결이 생각보다 쉬울 것으로 예상했다. 사건 현장이 아파트였고 범행 날짜와 시간이 비교적 정확하게 특정되기 때문에 공동현관과 엘리베이터의 CCTV만 확인하면 범인의 윤곽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사 S의 기대는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공동현관 CCTV는 아예 까맣게 꺼져 있었고, 엘리베이터의 CCTV는 오류로 인해 멈춘 화면만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곳의 CCTV가 모두 고장 난 상태였다. 엘리베이터의 CCTV마저 고장 난 사실을 알게 된 형사 S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범인을 잡기 위한 다른 방법은 없었다. CCTV가 없던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형사들이 발로 뛰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단서 삼아 사건을 풀어가던 방식이었다.
형사 S는 피해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탐문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의 이웃들, 동네 가게 주인들, 아파트 단지 경비원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피해자와 두 딸들이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탐문이 거듭되며 작은 균열이 하나 일었는데, 피해자의 둘째 딸 B 씨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B 씨가 최근 동거하던 40대 남성 C 씨와 다툼 끝에 헤어졌으며 현재 잠적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B 씨의 이야기에 형사 S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피해자의 둘째 딸 B 씨가 성인오락실에서 우연히 만나 4년간 동거를 했던 C 씨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생활능력이 거의 없었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은 점점 잦아졌다. 그 둘은 사건 발생 보름 전인 5월 중순 관계를 끝내고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는데, 그날도 역시 사소한 언쟁이 싸움으로 번졌고 화가 난 C 씨가 B 씨의 목을 졸랐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C 씨의 폭행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B 씨는 그날로 동거하던 집에서 도망쳐 나와 C 씨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 후, C 씨는 광주 시내를 배회하며 헤어진 여자친구 B 씨를 끈질기게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건의 성폭행 사건을 저지르게 되자 휴대폰을 끄고 잠적한 상황이었다. 형사 S는 C 씨의 신원을 확인했다.
C 씨는 성폭행 포함 전과 7범이었다. 그의 행적은 점점 형사 S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형사 S는 사건 당일 피해자의 주거지 인근에서 C 씨가 찍히진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형사 S의 예상처럼 인근 편의점 CCTV에서 C 씨가 선명하게 찍힌 영상을 발견했다.
화면 속 C 씨는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큰 키에 반팔 티셔츠와 토시를 착용하고, 등산복 바지를 입은 차림새였다. 머리는 짧게 깎았고 다부진 어깨를 가져 마치 권투선수 같은 인상을 풍겼다. 형사 S는 피해자의 집으로 향하는 C 씨가 찍힌 또 다른 CCTV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건 그를 직접 만나 모든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형사 S와 수사팀은 C 씨가 일용직 근로자로 종종 근로자 대기소에 나간다는 B 씨 증언을 확보하고 잠복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C 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8일 밤, 피해자의 둘째 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C 씨였다.
C 씨가 여자친구였던 B 씨에게 연락을 해올 것이라는 걸 형사 S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여자에게 강하게 집착하는 성향이었기에 B 씨에게도 그럴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 C 씨의 등장에 형사 S와 B 씨는 미리 말을 맞춰놓은 대로 움직였다. B 씨는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가능한 길게 통화를 이어갔다. 그 사이 수사팀은 걸려온 전화번호를 바탕으로 C 씨의 위치를 파악했다.
C 씨의 위치는 어느 공중전화박스 안이었다. 형사 S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형사 S와 수사팀이 도착했을 때 이미 C 씨는 사라진 후였다. 모두가 허탈해하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고 형사 S는 C 씨를 또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속페달 위에 올린 발끝에 힘을 주었다.
차선까지 역주행하며 도착한 두 번째 공중전화, 그곳에 C 씨가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여전히 B 씨와 통화 중이었다. 수사팀은 재빠르게 공중전화 박스를 포위하고 C 씨를 긴급체포했다. 6월 8일 21시 55분이었다.
C 씨는 체포된 직후부터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다. 심지어 형사들이 자신을 추적해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았던 이유는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여자친구 B 씨의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다정하고 포근한 목소리 때문에 닥쳐오는 현실조차 가짜인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형사 S는 4차에 걸쳐 C 씨를 심문했다. C 씨는 B 씨와 헤어진 후 그녀의 어머니가 거주하는 아파트 주위를 매일 배회했다고 고백했다.
B 씨가 어머니 집에 들어갔을 것이라 예상하고 기다린 것이다. C 씨는 과거 B 씨의 부탁으로 피해자의 집에 생필품을 가져다준 적이 있어서 피해자의 집 동호수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C 씨는 사건 당일 계단에 숨어있다 피해자가 누르는 도어록 비밀번호를 미리 지켜본 뒤, 자정이 넘은 시간 B 씨를 찾기 위해 집 안으로 몰래 침입했다.
집 안에 들어서자 거실의 불은 꺼져 있었고 안방에 한 여자가 누워있었다. B 씨라고 생각해 잠에서 깨워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사람은 B 씨가 아닌 A 씨였다.
한밤중 낯선 이의 침입에 깜짝 놀란 A 씨는 비명을 질렀고, C 씨는 잠깐 기절을 시켜 비명을 멈추게 할 생각으로 목을 졸랐는데 A 씨의 그만 숨이 끊어졌다고 말했다. 형사 S는 마치 마지막 펀치를 준비하는 권투선수처럼 C 씨를 노려봤다. 한 치의 거짓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날카로움이 서린 눈빛이었다.
C 씨는 막상 A 씨가 사망하자 본인도 놀라 집 밖으로 나왔지만 이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사체를 처리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사후 강직으로 사체가 무거워지자 사체 밑에 깔린 이불을 질질 끌어 베란다로 옮겼고, 베란다 벽장에 넣자니 공간이 너무 좁아 결국 시신의 상체를 먼저 아래로 집어넣는 방식을 쓰게 된다. 사체가 물구나무 자세로 발견된 이유였다.
형사 S의 짐작처럼 A 씨의 가방과 구두를 함께 숨겨 외출한 것처럼 상황을 만든 것도 C 씨였다. A 씨의 사체를 숨긴 C 씨는 B 씨가 나타나기까지 기다렸지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형사 S는 C 씨의 이런 진술에도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그간의 수사 경력으로 쌓아온 그의 직감에 의하면 무언가가 찜찜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기절시키려고 목을 조르다 실수로 죽였다는 점이 이상했다. 형사 S는 이 부분을 계속 파고들었다. 그러자 결국 C 씨는 마지막 진술에서 우발적 살인이 아닌 의도적 살인이었음을 고백했다.
평소 여자친구인 B 씨가 어머니 A 씨의 생활비와 아파트 관리비를 돕고 있었는데 가끔 푸념처럼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고 A 씨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고 했다.
우발적 살인이 아닌 의도적인 살인이었음을 자백한 것이다. C 씨의 마지막 진술로 형사 S는 마침내 사건의 진실에 도달한 후련함이 느껴지는 한편 기이한 자세로 사망한 피해자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자니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무겁게 짓눌러지는 듯했다.
→ 이 글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의 이야기를 토대로 작성된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