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사 J와 수사팀은 인천국제공항에서 A 씨의 신원을 확인하며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A 씨가 본명이 아닌 가명을 사용했던 것이다.
수사팀은 급히 A 씨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휴대폰 신호를 확인하려 했지만 3월 15일 이후 휴대폰 전원은 꺼진 상태였다. 그러나 3월 17일 오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수사팀이 인천공항을 방문했던 그다음 날이었다. 꺼져 있던 A 씨의 휴대폰 전원이 잠깐 켜진 것이었다. 형사 J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휴대폰 위치를 즉각 추적해보니 신호는 수원시 광교의 한 기지국에서 잡혔다. A 씨가 그곳에 있다는 강력한 단서가 확보된 것이다.
안양 동안경찰서 강력4팀과 형사팀은 물론, 지방청 광역수사대까지 현장으로 출동했다. 광교 지역의 기지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수사팀은 각 구역을 나눠 꼼꼼하게 수색했다. 얼마가 지난 후, 형사1팀이 광교의 한 공원 근처에서 수상한 인물을 발견했다.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덩치 큰 남자였다. 형사들은 곧 그의 정체를 직감했다. 남자의 체격과 모습은 용의자로 특정된 A 씨와 일치했다. 형사1팀은 주변에 은밀히 잠복하여 그를 주시했다. 체포할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는 중이었다.
당시 강력4팀의 형사 J는 다른 곳에서 수색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때 형사1팀으로부터 긴급한 연락을 받았다. 형사 J는 곧바로 A 씨가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한편 형사1팀은 공중전화박스에서 나온 A 씨의 뒤를 조용히 쫓고 있었다. A 씨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A 씨는 매대에서 물건을 고르고,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형사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주변을 감싸며 다가갔다. 한 명의 형사가 A 씨의 본명을 대며 본인이 맞느냐고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음에도 A 씨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조금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형사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자신이 고른 물건의 계산까지 마쳤다.
형사들은 A 씨를 편의점에서 체포한 뒤 그의 휴대폰과 소지품을 압수했다. 압수된 물건들을 확인한 형사들은 깜짝 놀랐다. A 씨가 소지하고 있던 물건들은 수상함을 넘어 그가 살인사건과 깊이 얽혀 있는 정황을 단번에 드러내는 증거들이었다.
먼저 A 씨는 B 씨와 C 씨의 아버지인 E 씨가 운전하던 벤츠 차량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이어 발견된 것은 C 씨의 여권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5만 원권 148매와 100만 원권 수표가 3장, 중국 위안화 100위안 지폐 31매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손목에는 금을 두른 명품시계까지 채워져 있었다.
강력4팀의 형사 J도 그 무렵 현장에 도착했다. 편의점에서 체포된 A 씨를 마주한 형사 J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C 씨의 아버지 E 씨의 행방을 물었다. A 씨의 대답은 태연했다.
평택의 한 창고에 있다는 것이었다. A 씨는 마치 E 씨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형사 J는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E 씨의 행방에 대해 재차 물었다. 그제야 A 씨는 말을 바꿨다. E 씨는 이미 사망했으며 본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함께 올라간 조선족들의 범행이라 답했다.

안양 동안경찰서 형사들은 곧바로 A 씨를 긴급체포했다. 사건 신고 후 22시간 만에, 이 끔찍한 살인사건의 중심에 있는 범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안양 동안경찰서에서 A 씨의 신문이 시작됐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A 씨는 뻔뻔하게도 본인이 피해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 자신이 인터넷에 올린 요트 광고 웹페이지를 보고 E 씨가 먼저 연락을 해왔고, 주식 투자를 권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해당 주식이 사기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원금 회수 문제로 E 씨와 큰 다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였다. A 씨는 오히려 E 씨 쪽에서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바람에 원금을 돌려받고자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A 씨는 2월 25일 있었던 일을 차분한 어조로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날 A 씨는 ‘개인 경호원’이라 부르는 세 명의 조선족과 함께 E 씨의 집을 방문했다. 부부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아 A 씨는 경찰이라며 신분을 속였고, 이를 눈치챈 E 씨의 아내가 “강도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고 말했다.
강도라는 말에 조선족 경호원들이 폭력적으로 나섰고, 둔기로 부부를 공격한 뒤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진술은 마치 자신이 사건의 중심이 아니었다는 듯 책임을 회피하는 느낌을 주었다. 불안해하는 기색 없이 거짓말을 하는 피해자와 마주앉아 있자니 오랜 기간 형사 생활을 해온 형사 J라 할지라도 눈 앞에 벌어진 상황에 기가 찰 일이었다.
한편 3월 17일 저녁, 안양 동안경찰서 강력1팀과 경기남부청 과학수사팀은 A 씨가 언급한 평택의 창고로 출동했다. 폐쇄된 창고는 고요했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건물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으스스함도 있었다.
형사들은 창고 문을 강제로 개방하고 내부로 진입했다. 창고 내부에는 빨랫줄을 수회 감아 단단히 묶어놓은 냉장고와 E 씨의 벤츠 차량이 있었고, 소각통 안엔 차량 블랙박스의 것으로 보이는 메모리칩과 휴대폰, 전자기기들의 타다 만 잔해들이 남아 있었다.
창고 내부에서 형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대형 냉장고였다. 형사들은 오랜 경험으로 냉장고가 숨기고 있는 끔찍한 비밀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형사들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노란색 이불로 덮여 테이프로 감긴 E 씨의 시신이 있었다. 아내 D 씨와 마찬가지로 E 씨의 얼굴엔 검은 비닐봉지가 쓰여 있었고, 칼로 찔리고 둔기로 맞은 흔적도 나왔다.
수사팀은 창고에서 발견된 E 씨의 차량 내부도 철저히 조사했다. 차량 안에는 E 씨의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증권카드뿐만 아니라 아내 D 씨의 물건들과 이들의 아들 C 씨의 명의로 된 통장이 무려 4개나 발견됐다.
수사에 속도가 붙으며 피해자들의 부검 결과도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소 충격적인 부검 결과가 나와 수사팀을 한 번 더 충격에 빠뜨렸다. E 씨의 아킬레스건에 있는 상처에서 생활반응이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이 상처는 사후에 생긴 것으로 부검의는 범인들이 사체의 피를 빨리 배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킬레스건을 절단한 것 같다고 의견을 전달했다.
E 씨와 D 씨의 사망 원인은 모두 질식이었다. 이에 수사팀은 범인들이 신용카드나 통장 비밀번호 등의 금융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피해자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것으로 판단했다.

형사들은 A 씨가 살던 집을 압수수색해 결정적 단서들을 추가로 확보했다. 수색 중 형사들은 E 씨의 차량 열쇠 한 개를 더 찾아냈고, A 씨의 거주지인 아파트 19층 소화전에서 범행 당시 A 씨가 신었던 나이키 운동화도 찾아냈다.
이어 형사들의 눈길을 끈 것은 책상 위 놓인 메모지였다. 메모지에는 “15억 원”이라는 거액이 적혀 있었다. 또한, A 씨의 공범으로 지목된 조선족들은 하건 당일 밤 다급하게 한국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지만 형사 J는 이들 공범들이 남긴 중요한 증거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공범 중 한 명이 내연녀 명의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형사 J는 공범의 내연녀 참고인 조사를 통해 범행 정황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2월 25일, A 씨는 조선족 공범들과 함께 E 씨 부부가 거주하는 아파트 복도에서 조용히 잠복하고 있었다.
A 씨는 공범들에게 15분 후면 E 씨가 도착할 거라고 하며 본인의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A 씨가 E 씨 차량에 GPS를 부착해 놓고 휴대폰을 통해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모든 살인 행위는 A 씨 혼자 실행했으며 조선족 공범들은 단순히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자신들은 그 현장에서 살인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형사들은 이들의 진술에 일정 부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추가 조사에서 이들의 거주지를 소개했던 부동산 중개업자 역시 공범들을 살인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했다. 형사들은 A 씨가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위해 조선족 공범들을 의도적으로 고용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했다.
모든 정황이 A 씨가 살인의 목적과 계획을 숨긴 채 단순히 협조를 요청하고 범행 과정을 치밀하게 설계한 뒤, 살인의 책임을 공범들에게 떠넘기려 했음을 암시했다.
A 씨의 휴대폰 디지털 포렌식 결과는 3월 20일에 나왔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A 씨는 자신의 범행과 관련된 수많은 기록을 휴대폰 속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2월 25일 A 씨가 D 씨와 E 씨를 결박한 뒤 촬영한 동영상이 남아 있었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A 씨의 발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GPS 구입 방법과 장착법에 대해 여러 차례 검색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A 씨는 GPS 구입과 장착법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그건 단순히 E 씨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라며 살인혐의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했다.
형사들은 A 씨와 공범을 대질할 기회가 없자, 직접 발로 뛰며 증거를 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하나둘씩 A의 범행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들을 하나씩 채집했다. 범행 이후 E 씨의 차량을 운전한 대리기사를 찾아낸 것도 그중 하나였다.
A 씨는 대리기사를 불러 E 씨의 차량을 자신의 주거지가 있던 동탄의 아파트까지 옮겼으며, 2월 26일 이삿짐센터 직원을 고용해 평택 창고로 냉장고를 옮긴 정황도 파악했다. 이 냉장고가 다름 아닌 E 씨의 사체가 숨겨져 있던 바로 그 냉장고였다. A 씨가 살인 이후 밀항 브로커와 접촉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형사 J와 팀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A 씨가 범행에 사용했던 도구를 구입하는 장면을 일일이 찾아내며 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갔다. 결정적으로 사건 현장과 평택의 창고에서 A 씨의 지문과 DNA가 검출되었다.
이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A 씨는 10차례나 이어진 신문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이 외워온 시나리오를 계속해서 차분하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하지만 형사들은 그의 태연한 거짓말 속에 숨겨진 진짜 모습을 간파하고 있었다.

A 씨는 가끔씩 감정이 격해지면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며 신문을 방해하려 들기도 했다. 하지만 형사 J 가 잊을 수 없는 A 씨의 표정은 따로 있었다.
하루는 A 씨가 갑작스럽게 조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해왔다. 감정적으로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형사 J는 요청대로 조사를 중단했다. 그리고 조사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데 A 씨의 표정이 한순간 바뀌었다.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던 것이다. 그 웃음은 단순한 미소가 아니었다.
후회나 반성은 없었고 조롱과 비웃음만이 담겨 있는, 마치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A 씨는 결국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으며 누군가의 부모를 살해한 죗값을 치르게 됐다. 그럼에도 자신이 저지른 짓을 부정하고 태연하게 웃는 살인범 A 씨의 표정은 형사 J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섬뜩한 인상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