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사건은 그 특성상 다른 형사사건에 비해 명확한 물적 증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범행이 주로 은밀하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장에 제3의 목격자가 존재하기 힘들고, 피해자와 피고인의 말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피고인과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피해자의 진술은 사실상 재판의 핵심 증거가 되어 판결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진술’을 언제나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며,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이 일부 부풀려지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수차례에 걸쳐 동일한 사건을 진술하는 과정에서 기억이 바뀌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심지어 집단적인 정서나 주변인의 영향이 진술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감정이나 관계에 의해 사실과 다름에도 일관된 듯한 진술이 형성되는 경우다. 법원이 이 부분을 세밀하게 살피는 이유다.
최근 내가 맡은 사건도 그러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피해자는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고, 이들 모두가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피해자 모두 진술을 끝냈다. 의뢰인은 그중 한 피해자의 진술 내용은 인정했지만, 나머지 진술은 사실과 다르다며 강하게 부인했다.
의뢰인의 입장은 “그런 일은 없었다”라는 식의 막연하게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장에 대해 “그 순간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런 행동 자체가 없었다”라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반박을 내놓았다. 의뢰인의 진술은 단순히 무조건적인 혐의 부인이 아니라 사건의 시간, 장소, 상황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행위 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의뢰인의 구체적인 주장을 바탕으로 나는 전체의 사건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면밀하게 검토했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 기록만 해도 열 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나는 피해자 진술이 이루어진 시점, 조사 방법, 표현 방식 등을 일일이 대조하며 진술의 신빙성을 흔들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여러 중요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부 피해자의 진술에서는 사건의 발생 시점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다르거나 시간대가 불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고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이 혼동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초기 진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이 후속 진술에 갑자기 등장하는 등의 조사 초기 진술과 후속 진술 간의 표현 변화와 같은 중요한 지점들이 발견됐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정리해 증인신문을 준비했고, 법정에서 신중하게 질문하며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과 구체성을 확인했다.
성범죄 사건은 매우 민감한 사건으로 피해자의 보호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피고인의 방어권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진술이 강력한 증거가 되는 구조 안에서 변호인의 역할은 무조건적인 반박이 아니라 “진술의 신빙성을 합리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판결 선고 기일을 앞둔 상태다. 결과가 어떠하든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고, 진술은 감정과 환경, 관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인이 더욱 차분하게 기록을 읽고, 정확하게 질문을 하고 사건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신중한 과정이야말로 법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진실’의 시작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