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필리핀 중부의 휴양지이자 무법지대로 불리는 앙헬레스. 이곳의 코리안데스크로 파견된 L 경감은 이 도시의 복판에서 벌어진 60대 한인 부동산업자 A 씨의 피살사건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초임 시절 형사팀에서 근무한 적은 있지만 그는 수사부서의 전문 경찰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곳 앙헬레스에 있는 이상 뛰어난 형사가 되어야만 했다.
L 경감이 확보한 단서는 단 하나,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킬러의 몽타주였다. 킬러의 도주 경로도, 살해 지시자의 흔적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결국 L 경감은 과거 90년대의 형사들처럼 ‘발품’을 팔아 수사에 나섰다. L 경감은 A 씨의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며 원한을 품을 만한 인물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교민사회 내에서 A 씨의 주변엔 ‘사방이 적’이었다. A 씨가 소유한 한인 대상의 호텔이 문제였다. 해당 호텔은 투자자를 모집해 수익금을 배분하는 구조였는데 A 씨의 사망 이후 호텔 경영권 분쟁까지 벌어진 상황이었다.
모두가 적이니 용의자 특정은 어려웠고, 코리안데스크로 온 L 경감이 혼자서 CCTV를 추적하거나 통신수사를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현지에서 쌓아온 ‘한국인 네트워크’가 있었다. 한인 교민들이 소문을 듣는 귀가 되기도 했고, L 경감에 정보를 전하는 스피커이기도 했다. L 경감은 교민들로부터 A 씨의 살인사건에 대한 중요한 제보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1년여가 흐른 2016년 가을, 이번에는 더 큰 살인사건이 앙헬레스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2016년 9월, 땀에 젖은 필리핀 현지 경찰이 코리안데스크로 찾아왔다. 필리핀 경찰은 앙헬레스 인근 사탕수수밭에서 세 구의 사체가 발견됐다고 전달했다. 사망자는 모두 동양인이었고 여성 한 명에 남성 둘이었다. 사탕수수밭의 땅이 너무 단단해 범인들이 사체를 깊이 묻지 못한 듯 보였다.
필리핀 경찰이 L 경감에게 건넨 사망자 사진으로는 국적이 불분명했다. L 경감은 이들이 한국인이라면 교민들이 쉽게 알아볼 것이라 여겨 교민사회에 물어보았지만 누구도 이들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었다. 관광객일 수도, 도주 중인 수배자일 수도 있다.
L 경감은 고민 끝에 필리핀 과학수사청을 찾았다. 그곳에서 사망자들이 입었던 의복의 라벨을 확인했고, 이들이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라벨에 한국어가 적혀 있었던 것이었다. L 경감은 과학수사청에서 이들의 지문을 받아 곧바로 한국으로 전송했다. 그로부터 세 시간 후, 이들의 신원이 특정되어 L 경감에게 전달됐다. 해당 사건을 같이 지켜보던 필리핀 경찰과 대만 경찰들은 세 시간 만에 지문 감식을 완료해 넘긴 대한민국 과학수사 기술에 깜짝 놀란 눈치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사탕수수밭에서 발견된 세 구의 시신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다단계 사기로 인터폴 적색수배 중이던 인물들이었다. 신원이 확인되자 L 경감은 곧바로 이들과 관련된 인물을 추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세 사람을 알고 있다는 교민 B 씨(남성)를 찾아냈다. 그는 세 사람에게 앙헬레스에서 숙소를 소개해 주고 다음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것이 전부라고 했지만 L 경감은 직감적으로 B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가 실은 범인일 가능성도 높다고 판단했다. 다만 문제는 늘 그렇듯 마땅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L 경감은 경찰청 인터폴계를 통해 전문수사관 파견을 요청했다. 그렇게 분석가, 프로파일러, 전문수사관, 현장감식 등 각기 다른 분야의 한국 수사관 네 명이 앙헬레스에 도착했다. L 경감과 수사팀을 꾸린 이들은 먼저 사망자들이 머물던 숙소를 감시했다. 이곳에서 뜻밖의 증거물이 나왔다. 콜라 깡통 하나에서 새로운 지문이 발견된 것이었다. 지문의 주인은 한국에 거주하는 C 씨(남성)로, 출입국기록 조회 결과 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기 필리핀에 있다가 귀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L 경감과 한국인 수사관들, 그리고 인근 코리안데스크 인력들이 총동원돼 앙헬레스 전역의 CCTV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협조가 안되는 곳엔 사비를 들여 CCTV 자료를 사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범인의 꼬리가 밟히기 시작했다. 한 영상에서 B 씨와 C 씨가 삽을 구매해 차에 싣는 광경이 잡힌 것이다. 그 장면을 시작으로 살인사건과 관련된 증거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L 경감은 수사를 진행하는 내내 B 씨와 연락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영장이 나오고 적색수배가 떨어질 무렵 B 씨가 돌연 연락을 끊고 잠적하고 말았다. L 경감과 수사관들은 37일에 걸쳐 B 씨의 위치를 추적했고, 필리핀 북부의 대만 인접 지역까지 그를 뒤쫓았지만 끝내 B 씨의 행방을 잡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때쯤 앙헬레스에서 또 다른 한인 납치사건 등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L 경감은 다시 천사의 도시로 복귀해야만 했다.
L 경감은 앙헬레스로 복귀한 뒤에도 B 씨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그러던 중, B 씨가 앙헬레스 인근에 위치한 도시 어느 콘도에 거주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구체적인 확인 끝에 L 경감은 B 씨가 여자 친구와 함께 실제 해당 콘도에 거주한다는 것이 실제임을 파악했다. L 경감은 곧바로 필리핀 이민청 직원들과 함께 B 씨가 거주하고 있는 콘도를 찾았다. B 씨는 이민국 지원들과 한 시간가량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필리핀 이민청에 검거됐다.
한편, 한국에서는 B 씨의 공범인 C 씨를 검거해 조사하고 있었다. 처음엔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던 C 씨는 B 씨의 검거 소식에 결국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건의 전말은 충격적이었다.
B 씨는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C 씨에게 1억 원을 제시하며, 수배 중인 다단계 사기범들을 함께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돈 앞에 흔들린 C 씨는 결국 앙헬레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B 씨는 필리핀에 은신 중인 이 수배자들에게 카지노 관련 투자금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투자금과 관련한 실랑이가 벌어지자 결국 반환해야 할 카지노 예치금을 돌려주지 않고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B 씨와 C 씨는 세 명의 은신처를 찾아가 총기로 위협해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현금을 먼저 챙겼다. 이후 이들을 외진 사탕수수밭으로 데려갔다. B 씨의 계획과 달리 C 씨는 살인을 망설였다. 그러자 B 씨가 직접 총을 들어 세 명을 모두 살해했다는 것이 C 씨의 자백이었다. 피해자의 사망 후에는 예상보다 흙이 너무 딱딱해 사체를 제대로 묻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C 씨는 결국 B 씨가 약속했던 사례금도 받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고, 두 사람이 메신저로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담긴 휴대폰의 위치에 대해서도 털어 놓았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거주지 인근 강에다 던졌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수사팀은 강가를 샅샅이 뒤져 그 휴대폰을 찾아냈다. 디지털 포렌식 결과 B 씨와 C 씨의 살인공모 과정이 고스란히 복원됐다. 이후 필리핀에서 재판을 받고 투옥된 B 씨는 탈옥을 감행하기도 했는데, 탈옥 후 그는 마약상으로 변신해 한국에서도 악명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편, 2016년 가을 L 경감이 기다리던 또 하나의 제보가 들어왔다. 1년 전 일어났던 한인 호텔 소유주 A 씨 살인사건에 대한 제보였다. 호텔 투자자 D 씨(남성)와 그의 절친한 친구 E 씨(남성)에 관한 것이었다. 제보자는 D 씨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인 필리핀 교민 E 씨에게 환전상을 통해 거액의 돈을 보냈다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살인사건이 일어날 무렵 E 씨가 필리핀 사람들을 통해 킬러를 물색했다는 소문도 돌았다는 제보였다.
결론적으로 D 씨와 E 씨의 호텔 투자금 문제에 관한 대화가 청부살인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였다. L 경감은 상세한 제보가 들어왔음에도 섣불리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계좌추적 등이 병행되어야 할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L 경감은 수사계획서를 정리한 뒤, 2017년 2월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L 경감은 곧바로 인터폴계에 배치됐고, 과거 인연이 있던 베테랑 형사에게 이 사건파일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함께 파헤치기로 했다. 마침내 A 씨 사망 사건의 범인은 한국 인터폴계가 콘트롤타워를 맡고 한국 수사팀과 앙헬레스 코리안데스크의 공조로 4년의 긴 추적 끝에 검거되었다.
한편, L 경감의 앙헬레스 활약상은 드라마 제작진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각색된 드라마 〈카지노〉는 2023년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