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28일 천안교도소가 예기치 않게 언론에 보도된 사건이 있었다. 중국인 수용자가 대운동장에서 운동 중 담을 넘어 뒷산으로 도주했다가 직원들에게 잡혔던 사건이다. 도주를 차단하기 위한 전자경비시스템 울타리가 있었지만 주벽으로 연결된 건물의 돌출 부위를 잡고 올라가 5m 높이의 담장 밖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시설이었지만 중국 기예단 출신의 수형자는 불과 몇 초 사이에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다행히 출동한 직원들이 도주자를 체포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운동장 근무자 4명이 징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4개월 뒤였던 12월엔 운동 중이던 한국인 수용자가 정문동과 연결된 전자경비시스템 위에 올라 주벽을 타고 뛰어내렸다가 직원들에게 바로 잡히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첫 번째 도주 사건 이후 시설을 보강하고 정문동의 창살을 모두 철판으로 막고 기름칠까지 해놓았지만 손톱으로 철판 윗부분을 잡고 10여 미터 이동해서 주벽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직원이 발견해 체포했다. 도주 방지를 위해 전자경비시스템을 도입한 후에 이런 일이 연이어 발생한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한 해에 두 번씩이나 그것도 같은 소에서 수용자가 담을 넘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사람이 다니는 길, 차가 다니는 길처럼 길의 유형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그 삶 역시 하나의 길이다. 삶에 있어서 같은 길이라도 누군가에겐 오르막길이기도 하고, 내리막길이 되기도 한다. 어떨 때는 똑바른 길인 듯하다가도 구불구불 굽어진 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교도소 문을 통과하는 길도 그렇다. 같은 길이지만 입소할 때는 절망의 길이 되고 출소할 때는 희망의 길처럼 여겨진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교도소에 수용되는 길을 걷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 길을 꿈꾼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수용자들의 인생 역정을 곁에서 들여다보는 교도관의 길을 걷다 보면, 교도관은 어쩌면 성직자와 같은 사명감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인내와 절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수형자들 중에는 일반의 상식을 초월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차마 인간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사건도 생긴다. 특히나 가족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백지상태인 수형자들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어 곤란할 때도 있다. 하
퇴직을 앞두고 지나온 교도관 생활을 되돌아보니,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있었지만 그래도 소명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만큼은 남아 있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 해소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작업 팀장을 할 때 유독 인상적인 수용자가 있었다.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공장에 출역해 성실하게 일하고 모범적인 수용 생활을 하던 무기수 K다. 외국인이었던 그는 한국인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되자 청부살인을 저질렀고 그 대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감옥에 들어온 후 23년간 단 한 번의 징벌도 없이 규율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해 왔고 전임 작업 팀장도 K에 대한 칭찬과 함께 인수인계를 할 정도였다. 내가 작업팀장으로 있을 때도 K는 무척 성실하였고, 내가 자리를 운영지원팀장으로 옮기고 1년이 다 되어갈 때도 그는 여전히 성실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79세가 된 K는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공장에 열심히 출역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K를 교도소에 그대로 두고 퇴직한다는 것은 교도관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무언의 압박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다. 수용자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단 하
교도관 생활을 하다 보면 모범적이고 성실한 수용자들의 모습에 뿌듯할 때도 많지만 수용자의 예측 불가한 행동으로 긴장해야 할 때도 있다. 수용자의 행동이 예측 불가한 만큼, 그때마다 교도관들의 상황판단도 민첩해야 더 큰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이른바 ‘니코틴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을 위해 미결 수용되어 있던 W의 사건은 <용감한 형사들>을 포함해 여러 방송에서 다룰 만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2017년 당시 21살이었던 W가 자신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던 19살이었던 여성과 혼인신고를 하고 일본 오사카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여행 첫날 아내가 사망하며 밝혀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W가 거액의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니코틴 원액을 여성의 혈관 내에 주사했고 여성이 급성 니코틴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W가 일기장에 써놓은 버킷리스트에는 00살까지 00억 만들기 등의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하는데,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이 어린 여성의 생명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려는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사건이었고 죄질이 아주 나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교도소에 들어온 후 W는 중독
2017년 8월 29일 자 뉴스에 이런 헤드라인의 기사가 실렸다. “네가 모셔라” 자식 다툼에 흉기 휘두른 90대 아버지.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90대의 노인이 자신의 부양 문제를 놓고 다투는 딸들을 보고 격분해 흉기를 휘둘렀다는 것이다. 경찰은 살인미수 혐의로 노인(당시 95세)를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인은 미국 시민권자로, 큰딸 집에 모인 자식들 중 큰딸과 막내딸이 자신을 부양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이자 막내딸의 뺨을 때리고 허리춤에 숨겨 둔 흉기로 싸움을 말리는 막냇사위의 목과 옆구리를 찌르고 말았다. 다행히 막냇사위는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과 함께 미국에 살던 노인이 한국에 돌아오면서 부양 문제를 두고 딸들 간에 평소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노인이 막내딸 집에 머무는 동안 딸이 자신을 내보내려 한다고 생각해 막내딸과 사이가 좋지 않아졌고, “해코지를 당할까 봐 방어 차원에서 흉기를 지니고 있었다”라고 경찰에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인은 현장에 있던 가족 중 한 명의 신고로 현행범으로 체포,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결국 살인미수 혐의로 구치소에 수용되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내가
오전 7시,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전을 받았다. 아침부터 미지정 사동에서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몇 년 전 내가 미지정 사동을 담당할 때 데리고 있던 30대 후반의 J였다.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수용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던 J가 싸움을, 그것도 아버지뻘 되는 수용자 C와 싸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있었고 C가 J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한마디 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말에 J가 C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J답지는 않은 행동이었다. J가 아버지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가 보육원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C가 며칠 전에도 J에게 “너 보육원 출신이냐?”고 물어봐 기분이 나쁘던 차에 애비 없는 자식 소리까지 나오자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J의 이름을 부르며 “너 답지 않게 왜 그랬어?” 라고 물어보자 눈물을 왈칵 쏟는다. J가 사과를 하고 싶다 하고 C 역시 자식뻘 되는 놈 처벌받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나는 팀장의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J에
대전교도소에서 야간 2팀 부당직 업무를 볼 때였다. 부당직은 새벽 2시에 당직을 교대해 아침 6시까지 소 전체를 책임지는 일을 한 다. 그날 새벽 5시쯤이었다. 60여 명이 3,200 여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취사장에서 약간 의 소란이 일어난 듯했다. 가석방 특혜 등의 인센티브를 주기도 할 정도로 한여름의 취 사장 출역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간간이 출역을 거부하는 수용자들도 있다. 그날은 수용자 A와 반장 사이에 일이 있는 듯했다. A가 작업거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반장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계속 출역을 거 부하고 혼자 조사실에 간다니 A를 조사수용 시키라며 남 일 이야기하듯 말했다. 나는 다 툼을 한 사람을 같이 보내야 하니 데리고 오 라고 했다. 그제야 반장은 머뭇거리며 두 사 람을 화해시키겠다고 했다. 수용자를 조사수용 시키는 일은 교도관 입장에서 시간 낭비도 줄이고 일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나는 그 방 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구나 힘든 출 역을 한다는 건 가석방 출소를 기대한다는 것 일 텐데, 이번 일로 징벌을 받으면 그 혜 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A가 마음을 잡고 취사장 일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그로
D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몇 년 전, 외정문에서 접견을 기다리는 한 부부를 보게 되었다. “제발 사정 좀 봐주세요, 여기 신분증을 찍은 사진이라도 낼게요” “안됩니다. 돌아가세요.” 멀리 부산에서 아들을 보러 온 부부였는데, 하필 어머니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아 외정문 근무자에게 사정을 하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몇 번 접견을 온 적 있었고, 신분증을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근무자는 원칙을 내세울 뿐 요지부동이었다. 평소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원칙대로 일하는 강성 근무자라 아무래도 어렵겠다 싶어 나 역시 지나가려는데, 부부가 내게 달려와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도저히 그 눈물을 외면할 수 없어 부부를 모시고 민원실로 향했다. “계장님! 이러시면 안 되죠! 민원실에서도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쩌려고 이러세요? ” 외정문 근무자는 밖으로 나와 내게 따지기 시작했다. 그의 격렬한 항의에 부부의 얼굴은 다시 잿빛으로 변했다. 나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한 뒤 부부를 민원실로 모시고 갔다. 알고 보니 신분증 없이는 안 된다고 했던 민원실의 대답은 아직 일이 미숙한 직원의 잘못된 안내였다. 역시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접견 잘하고 가시
미지정 사동은 교도소 안에서도 가장 험난한 곳으로 악명이 높다. ‘험지 중 험지’로 불리며 교도소 직원이라면 다들 고개를 흔들며 피하려 한다. 이해는 된다. 이곳엔 규율을 상습적으로 어기거나 정신적인 문제로 단체생활이 어렵거나, 신체적으로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통제가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게다가 이곳 수용자들 중 절반 이상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라 사람들이 더 예민한 상태다. 오늘도 나는 이 험지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다들 미지정 사동을 꺼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바람에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만큼 인간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깊이 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지정 사동에서 근무했던 시절은 아득히 멀어졌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몇 사람이 있다. “주임님, 제 얘기 좀 들어주십쇼…” 어느 날 아침, 한 노인 수용자가 나를 찾았다. 늘 그렇듯 바쁜 아침이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뭔가 무겁고 오래된 사연이 느껴졌다. 직업군인으로 퇴직한 노인은 매달 군인연금 300만 원이 꾸준히 나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교도소에 들어온 후부터 연금은 부인에
내가 처음 천안소년교도소에 들어섰을 때, 이곳은 약 1,300명의 소년수용자와 SOFA 수용자, 미결 성인수, 공안사범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법적으로 소년수는 14~19세지만, 최대 23세까지 수용 가능해 겉모습만 보면 성인 같은 청년들이 많았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위압적인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교도소는 단순히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검정고시와 대입 준비, 자동차 정비 같은 직업훈련, 농악과 복싱을 배우는 충의대 활동, 그리고 위탁공장에서의 노동 등 변화와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소년수형자들은 결손가정 출신으로, 부모의 부재와 빈곤한 환경 속에서 범죄에 쉽게 노출된 아이들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과도한 형량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특히 접견 업무를 하며 마주한 이야기들은 나를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접견 연출 근무는 소년수들을 사동이나 공장에서 접견실까지 데려오고, 접견이 끝난 뒤 다시 데려다주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10여 분 동안 나누는 대화 속에는 무거운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느 날, 1공장에서 A라는 소년을 데리러 갔다. 하지만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