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천안소년교도소에 들어섰을 때, 이곳은 약 1,300명의 소년수용자와 SOFA 수용자, 미결 성인수, 공안사범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법적으로 소년수는 14~19세지만, 최대 23세까지 수용 가능해 겉모습만 보면 성인 같은 청년들이 많았다. 온몸에 문신을 새긴 위압적인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교도소는 단순히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었다. 검정고시와 대입 준비, 자동차 정비 같은 직업훈련, 농악과 복싱을 배우는 충의대 활동, 그리고 위탁공장에서의 노동 등 변화와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소년수형자들은 결손가정 출신으로, 부모의 부재와 빈곤한 환경 속에서 범죄에 쉽게 노출된 아이들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 과도한 형량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았다. 특히 접견 업무를 하며 마주한 이야기들은 나를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접견 연출 근무는 소년수들을 사동이나 공장에서 접견실까지 데려오고, 접견이 끝난 뒤 다시 데려다주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10여 분 동안 나누는 대화 속에는 무거운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어느 날, 1공장에서 A라는 소년을 데리러 갔다. 하지만 그는
1982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명동성당 성물방 건물에서 사목국장 신부님과 마주하고 있었다. 손에는 내가 며칠 밤낮을 고민하며 준비한 신학교 입학원서가 들려 있었다. 내가 품어온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부님, 입시 요강 어디에도 그런 기준은 없습니다. 접수받으신 후 버리셔도 좋으니 접수는 받아주십시오.” 신부님은 원서를 가져가라고 하시며 끝내 내 원서를 받지 않으셨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느님께서 날 시험하고 계신 걸까?”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신부님, 저도 압니다. 제 부족함을요. 하지만 우리 본당 신학생이 그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올해 신학교에 부르실지 모른다’고요. 하지만 신부님은 끝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져가세요. 원서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참고 있었던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성당 안은 고요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 상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제 잘못입니까, 주님? 제 부족함이 너무 큰 탓입니까?” 신부님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그의 차가운 태도가 자꾸만 마음을 후벼 팠다. 성당에서 평생 배운